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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시위 가담… 또 감옥행 위기(유랑­탈출 50년:하·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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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시위 가담… 또 감옥행 위기(유랑­탈출 50년:하·끝)

입력
1994.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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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 9년 「짧은 행복」 다시 도피의 길/총살 위험뚫고 미얀마 국경넘어/한국대사관선 “돌아가라”… 절망/마약조직에 도움 요청… 라슈 거쳐 쿤사왕국으로 76년 9월9일은 「사상범죄자」들의 대명절이었다. 모택동이 죽은 것이다. 세상은 변했다. 문화혁명이 종말을 맞자 각종 규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백한 반혁명분자로 분류된 나는 복권되지 않았고 오랜 권력투쟁 끝에 등소평이 집권한 뒤 80년이 돼서야 자유가 주어졌다. 반혁명의 바가지를 쓴지 20년만이었다. 일단 노동개조대농장에서 가까운 성길사한(칭기즈칸) 읍내로 나와 농막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 힘들었지만 행복한 시절이었다. 철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식량도 충분했다. 81년에는 딸 미령(13)이를 낳았다.

 개혁·개방정책으로 외국방송 청취와 외국과의 서신교류가 허용됐다. 유일한 오락기구인 고물라디오로 한국의 극동방송을 청취하기 시작했다. 혹시 아버지소식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지만 점차 방송 자체를 즐기게 됐다. 방송에 자주 나오는 유관지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처지를 설명하고 아버지를 찾고 싶다고 하자 곧 도와주겠다는 답장과 한국어 성경책이 왔다. 그뒤 한국의 여러 목사들과 서신을 교환하게 됐다. 그들은 책과 돈을 부쳐주며 복음전파를 요청했다. 유물론만 듣고 살아온 터에 기독교는 생소했지만 인간쓰레기로만 몰리던 나는 어느덧 성경을 통해 나의 존재가치를 찾게 됐다. 유목사가 보내준 「백범일지」는 애국·애족심을 키워주었다. 백범은 숭배의 대상이었고 생활의 표본이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치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국조선족이 가장 바라는 것은 한국에 가는 것이다. 중국에 온 한국사람들이 돈을 물쓰듯 하고 조선족동포들을 업신여긴다는 소리도 들렸지만 한국은 기회의 땅으로 생각됐다. 한국에 가기만 하면 막노동을 해도 1년안에 큰 부자가 되어 온다고들 했다. 조선족사회에서는 한국기독교가 바람을 일으켜 어디서나 십자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88년 천진부근 진황도시로 이주, 교회일에 전념하면서 북경 천진을 오가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을 도와 교회 세우는 일을 했다. 서울의 기독교계에서는 한달에 1백달러씩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그러나 89년 6월4일 북경 천안문광장의 시위이후 내 운명은 또 바뀌었다. 그때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에는 범기독교세력이 동참했고 나 역시 적극 참가, 신문과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돌렸다. 중국군은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탱크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우리는 이 사건을 6·4참안이라고 부른다. 일단 천진의 집으로 피신했으나 당국이 배후조종세력으로 외국인과 접촉한 기독교인들을 지목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실제로 북경에서는 기독교인에 대한 대대적 검거선풍이 불고 있었다. 매일같이 집에 공안원이 찾아왔다. 안 그래도 평소 외국인 선교사와 만나 불순사상을 배운다느니 정치선동을 한다느니 하는 의심을 받던 차였다. 하루는 당서기가 찾아와 증명의 유효일이 지났다며 3일안에 새로 떼어오라고 했다. 증명을 다시 떼려면 내몽고까지 다녀와야 하는데 그 기간에는 불가능했다. 당서기는 막무가내였다. 이제 또 끌려가면 나는 끝장이다.

 어디론가 가야 한다. 몽골이나 북조선으로는 갈 수 없다. 한국으로 가고 싶지만 그곳은 너무 멀다. 증명없이 비행기를 타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단 중국을 벗어나고 보자. 중국은 내가 반세기를 살아온 곳, 우리가족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내  고향, 내 조국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그 넓은 대륙에 내가 살 수 있는 곳이란 좁고 더러운 감옥뿐이었다.

 6월 하순 어느날 밤. 몰래 가족을 데리고 북경으로 갔다. 중국의 서쪽끝 도시인 서려(운남성)에 가기로 하고 그곳에 가장 가까운 곤명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목적지는 미얀마. 미얀마에는 한국대사관만 있고 북조선대사관이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웅산이라는 곳에서 북조선 간첩이 한국정부요인들을 폭파살해한 사실이 발각돼 북조선대사관이 쫓겨났다는 것이다. 미얀마는 사회주의국가로 중국과 사이가 나쁘지 않아 국경 넘기가 수월하다는 말도 생각났다. 국경을 넘어 한국대사관에― 이것이 내 계획의 전부였다.

 기차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렸다. 곤명에서 하루 잔 뒤 아침 일찍 버스를 탔다. 버스는 꼬불꼬불 산길을 타고 하루종일 달려 서려에 도착했다. 우리는 그곳에 1주일이나 머무르며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중국쪽보다 미얀마 국경수비대의 검문이 까다로웠다. 밀입국자는 총살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내일 미얀마로 들어간다』 어느날 밤 나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나야 이미 목숨을 던진 일이 여러번이지만 가족들은 처음이다. 입을 꼭 다문 채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가족들에게 해 줄 말이 없었다.

 다음날 국경선 부근 대나무숲에 도착, 숨어서 새벽을 기다렸다. 열대의 숲은 무더웠고 모기와 벌레가 극성이었다. 바로 옆으로 커다란 뱀이 지나갔다. 어린 미령이조차 입을 열지 않았다. 그만큼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었다. 인기척만 느껴지면 납작 엎드렸다. 꼭 누군가 뒤따라오는 것같아 몇번이고 돌아보았다. 허리 깊이의 물살을 헤치며 미령이를 업어 건넌 뒤 다시 건너가 철이와 함께 아내를 붙잡고 건너왔다. 이번에는 너무 하류로 밀려내려와 미령이가 보이질 않았다. 아이 우는 소리를 따라 한참 올라가서야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국경선을 넘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기진맥진한 우리는 쓰러져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놀라 깨보니 사람들이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미얀마 소수민족인 샨족이 분명했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미얀마 국경도시인 무사이까지 도착했다.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편중독자였다.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게릴라들에게 몇차례나 운명을 맡긴 채 한국대사관이 있는 양곤쪽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이 이끄는대로 뗏목도 타고 버스도 타고 산길을 걷는 동안 사기를 당해 갖고 있던 1만5천원을 다 털린 뒤 가까스로 양곤에 도착했다.

 중국인교회를 찾아가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한국말을 들으니 말보다 눈물이 먼저 나왔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상대방은 재촉했다. 『저 문충일입니다. 중국에서 건너온 정치범입니다』 나는 중국을 거쳐 양곤까지 흘러온 내 인생을 몇분동안에 설명해야 했다. 그는 잠자코 들어주었다. 『거기서 잠깐 기다리세요. 대사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전화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금방 연락드리겠습니다』 아내는 뭐라고 하더냐고 채근했지만 기다려보자는 말뿐 할 말이 없었다. 입이 바짝 마르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전화벨이 울렸다.

 『문선생님, 우리는 외교사절단입니다. 법을 어기고 선생님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입장입니다. 미얀마법은 불법입국자를 가차없이 수감하고 있습니다. 빨리 가족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가십시오』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사정하고 만나서 이야기라도 들어달라고 해도 같은 말뿐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기왕 이렇게 된 것 마약밀매단에 끼여볼까, 보석밀매를 해볼까. 미얀마 북부도시인 라슈로 들어갔다. 나는 모험을 하기로 했다. 현지 마약왕 라성한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이다.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말렸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경비가 삼엄한 라성한의 집에 무턱대고 찾아갔다가 몇번 쫓겨난 끝에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감사를 표시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당장 먹고 살 돈과 공민증, 직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의외로 정이 많아 같은 중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이튿날 라슈의 국민학교 교사로 취직됐다. 천안문사태로 수배된 정치범이라고 했더니 나를 상당한 지식인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후 3년간 라슈에 머무르면서도 나는 한국에 가려면 먼저 태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한국 목사들에게 편지를 띄워 사정을 호소했다. 라성한은 마약계에서 지는 별이며 이미 쿤사라는 인물이 국경지역을 장악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여러 사람에게 태국으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던 나는 92년 미얀마와 태국국경을 장악한 쿤사왕국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쿤사의 심복인 지역사령관과 안면있는 사람을 사귀어 그에게 태국국경까지 데려다 줄 것을 부탁했다.

 차를 타고 사흘정도 밤낮으로 달려 도착한 곳이 바로 메수야. 쿤사왕국의 대문으로 통하는 도시였다. 지역사령관은 의외로 우리 가족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중국계 지식인을 우대하는 분위기였고 나는 쿤사가 세운 학교의 교사로 일하게 됐다.

 그리고 2년 뒤 우리 가족은 쿤사왕국을 탈출, 방콕을 거쳐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왔다. 50년에 걸친 유랑과 탈출은 이제 끝났다. 아직 우리는 무국적자다. 그래도 행복하다. 최소한 나의 아들딸은 축복받은 조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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