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 서로 주고 받는 물질의 흐름은 거의 예외없이 균형의 원칙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일방적으로 물질을 빼앗아간다면 그것은 일종의 약탈이고 결국 인간관계는 끝나고 만다. 뇌물과 같이 무엇을 노리고 갖다 바치는 교환이 있는가 하면, 결혼식이나 문상 때의 부조금과 같이 서로 도우면서 기존의 인간관계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 교환 방식도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혼례에서도 신랑쪽이 신부쪽으로 봉채를 주고, 신부쪽이 시집올 때 예물을 마련해온다. 이것 또한 새로 맺은 사돈관계를 의례적으로 탄탄히 다지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혼수가 「지참금」이라는 형식으로 딸을 가진 부모들의 고민거리가 되고, 지참금이 적다는 이유로 결혼관계가 파탄에 이르는 보도를 우리는 심심찮게 접하고 있다. 문제의 신랑들은 지참금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전문직의 젊은이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런 지참금 시비에서도 균형의 원칙은 적용된다. 신랑의 입장에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만한 자격을 얻었거나, 이만한 지위에 올랐는데 품위유지도 하고 밑천도 뽑아야겠다는 것이다. 또한 신부쪽에서는 상당한 투자이기는 하지만 남이 부러워할만한 사윗감을 얻는다는 보상이 따른다. 이런 식으로 거래의 균형이 이루어지는데 무엇이 나쁘냐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혼인식 전에 이런 지참금의 「흥정」이 이루어져서 계약서의 형식으로 분명히 약속되었다면, 후에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은 그 책임을 따져야 할 문제이리라. 그러나 혼전에 지참금을 분명하게 약속받는 것이 야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결혼 후에 두고두고 「나만한 사람한테 그 정도 밖에」라는 식으로 윽박지르는 데에서 문제가 폭발한다. 지참금이 강요되는 거래에서는 부부관계의 바탕이 되는 애정이라는 요소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왜들 이러는가? 자신의 성취나 지위를 지참금으로 보상받으려는 치사함도, 지참금을 덤으로 주고도 그런 배우자와 짝을 짓겠다는 사람의 정신상태도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먼 것만 같이 느껴진다.<이문웅 서울대교수·인류학>이문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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