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왕국서 살아나온 문충일씨 수기/“쿤사조직 정보누설” 누명/세계 아편 등 70% 생산 밀매 “무서운 집단”/현지 정착 2년만에 가족 이끌고 “대탈출” 마약왕국 쿤사의 비밀을 누출시킨다는 의심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당하다 탈출, 지난 12일 한국에 온 문충일씨(56·본명 문신봉)의 삶은 유랑과 탈출로 점철돼 있다.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일제압박을 피해 중국으로 갔던 문씨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20년간 징역살이와 강제노역을 했고 중국탈출 후에도 동남아 오지를 전전하다 마약왕국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파란만장한 문씨의 삶을 그가 쓴 수기로 들어본다. 문씨의 수기는 「탈출」이라는 제목으로 곧 출판될 예정이다.【편집자주】
94년 1월 17일 태국 미얀마 라오스 접경지역의 쿤사 마약왕국(일명 골든 트라이앵글). 당시 내 이름 앞에는 「쿤사조직의 한국계 요원」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쿤사왕국에 들어온지 벌써 2년이 지났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메수야는 미얀마와 태국의 국경지대로 마약왕 쿤사가 거주하는 호몽시와 인접해 있다. 호몽시는 쿤사가 독립을 선포하고 수도로 정한 도시다. 그래서 메수야는 「쿤사의 대문」이라고 불린다. 나는 이곳에서 중국인마을 아이들을 모아 중학교 과정까지 가르치는 교사생활을 했다. 쿤사가 세운 이 중국인학교는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무기보급기지로 사용된다.
쿤사의 심복인 지역사령관(교장)의 절대적 신임 덕분에 나는 쿤사왕국에서 비교적 편안히 살 수 있었다. 사실 우리처럼 국적없이 떠도는 사람에겐 쿤사의 그늘처럼 안전한 곳도 없다. 그 만큼 그는 강하다.
그러나 이제 내 주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내가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한국행을 꾀하고 지난 달 서울에서 온 기자들이 아내를 인터뷰해 간 사실이 쿤사지도부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역사령관은 우리 가족을 「정보누설자」로 규정하고 공개처형명령을 내렸다.
○비밀 너무 많이 알아
쿤사는 무섭고 강력한 조직이다. 동남아의 어느 정부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다. 세계 아편과 헤로인의 70%를 생산, 밀매하는 쿤사는 단순한 마약왕이 아니라 일국의 지도자다. 샨주의 독립을 선포하고 미얀마와 대대적 전쟁을 벌인 일도 있다. 탄약과 자금이 풍부하고 훈련도 잘 돼 있어 재정부족에 시달리는 미얀마군보다 오히려 더 강했다.
나는 쿤사와 기념사진을 찍을 정도로 신임을 받았었다. 메수야학교는 보급기지였기 때문에 쿤사의 무장현황을 자연히 알게 됐다. 쿤사는 비밀병기 개발을 극비 추진하는 것 같았다. 92년 8월 어느 날 사령관이 손바닥 두개 크기의 상표지를 갖고와 해독을 부탁했다. 중국어 영어로 쓰여진 상표지를 사전을 뒤져가며 읽어보니 플루토늄에 대한 것이었다. 설명을 해주자 사령관은 『보급창고의 비밀무기에서 떨어진 것』이라며 『중국돈 50만원이나 주고 사온 것이니 극비로 하라』고 지시했다. 물건은 호몽으로 보내졌다. 비밀무기 개발을 어느 정도 추진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것까지 보고 들은 나를 그냥둘 리가 없다.
사실 나는 지금도 그의 비밀을 폭로할 생각이 없다. 나는 쿤사왕국을 탈출한다기보다 한국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다. 쿤사는 중국에서 탈출해 오갈 데 없는 우리 가족을 보살펴준 사람이다. 하지만 내 생각을 조직에 전할 방법이 전혀 없다. 또 전해봐야 소용없다. 그러기에는 내가 쿤사조직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들에겐 모두가 동지 아니면 적이다. 이전에도 나와 비슷한 이유로 조직에서 벗어나려 했던 수십명이 지역사령관에게 사살당했다. 쿤사지도부는 끝까지 우리를 쫓으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당장 입을 옷가지와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챙겨 마을을 빠져나왔다. 아내는 아이들을 끌어안고 울었다. 아이들이 불쌍했다. 도망치는 일에는 이골이 나있지만 우리 가족의 표류는 여간해서 끝나지 않을 모양이다.
○비행기 탈 엄두못내
가능한 한 멀리까지 가는 차를 타고 차가 서면 걸었다. 일단 메홍손까지 간 뒤 그 곳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많은 치앙마이나 방콕으로 도망가야 한다. 나는 태국말이 서투르지만 아들 철(19)은 어려서부터 나를 따라 탈출과 은신생활을 한 탓에 중국어 태국어 미얀마어는 물론 소수 민족언어가 유창하다. 메홍손공항에서 철이 치앙마이행 비행기표를 사왔다. 그러나 쿤사의 조직원이 공항을 감시하고 있다는 생각에 비행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발길을 돌렸다.
조그마한 도시가 나왔다. 태국인과 함께 샨족들도 보이고 말레이계 종족들과 서양인도 섞여 있었다. 중국인이 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이런 후미진 곳도 안전하진 않지만 시간은 벌 수 있다. 우리 식구가 섞여들어도 전혀 표시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당분간은 그들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할 줄 안다. 쿤사의 밑에서 살 때 우리는 얼마간 행복을 느꼈다. 나를 지켜주는 그늘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편안한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비록 세상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약왕이었지만.
나는 만약에 대비, 인근의 몇개 마을을 대피처로 물색해두고 언제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운전사도 포섭해 놓았다. 며칠 후 메홍손에서 전화연락이 왔다. 그 곳 변두리에서 활동중인 B선교사였다. 다급한 목소리였다. 『무서워서요, 벌써 세번이나 왔다 갔어요. 주변을 맴돌고 있어 밖에 나갈 수도 없고…』
B선교사는 서른이 넘었지만 시집도 안가고 태국북부 오지에서 미얀마로 밀려온 카렌족 난민을 돌보고 있는 한국여인이다. 나는 메수야에 있을 때 그의 교회에 자주 가 한국행을 의논해왔다. 쿤사는 내가 탈출하자 B선교사를 통해 나를 찾으려 하는 모양이다. 내가 B선교사를 통해 쿤사비밀을 빼돌렸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B선교사도 위험해질 수 있다. 이제는 그에게 전화도 하면 안된다. 전화도청도 걱정됐고….
2월 2일. 이제는 이곳도 떠나야 한다. 서울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다. 일단 방콕으로 가야겠다. 92년 B선교사를 통해 명함을 받은 방콕거주 한국교민 이성우씨(46·여행업)를 찾아가야 한다. 메홍손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감시의 눈초리가 내 뒤통수를 쫓는 것 같다. 불안했다.
방콕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저 문충일인데요, 지금 공항입니다. 네, 탈출했어요, 쫓기고 있습니다. 살려주세요』 무작정 매달렸다. 이씨는 우선 집으로 오라고 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이씨는 시내의 한 아파트에 숨겨주고 우리 사정을 한국대사관등에 알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대사관이나 서울에서는 아무 연락이 없다. 미국대사관도 찾아가 봤으나 한국말을 하는 직원은 『한국정부가 풀 문제』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밤마다 악몽 시달려
기약없이 또 며칠을 불안과 공포 속에서 보냈다. 밤마다 쿤사조직원이 총을 쏘거나 칼날을 번뜩이며 들이닥치는 꿈을 꾼다. 식구들도 비슷한 악몽에 시달리는 눈치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다.
이씨는 정말 은인이다. 매월 1만바트(한화 약30만원)의 방세와 생계비를 아무 조건없이 내놓았다. 식량과 옷가지도 마련해주고 서울과 끊임없이 연락을 취해주었다. 이씨의 도움으로 아들과 딸은 한국교민집에 들어가 양아들 양딸행세를 했다. 5월들어 한국정부가 움직이는 기미가 보였다. 그동안 우리 이야기가 언론을 탔고 대사관은 우리에게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인터뷰를 주선했다. 5월 29일과 6월 16일 두 차례 인터뷰를 했다.
7월 8일 드디어 유엔에서 난민판정을 내렸다.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뚫렸다. 그로부터 한달여 뒤. 나와 가족은 드디어 한국에 도착했다. 방콕에 은신한지 6개월만이다. 한평생 계속된 유랑과 탈출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지금도 깜짝깜짝 놀라곤 하지만 이제는 안전한 고국땅임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한국정부 교민 언론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와 가족은 벌써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문충일씨 행로
▲1938 평북 용천군 동하면 삼인동 출생
▲1941 부모 따라 만주로 이주
▲1945∼1952 흑룡강성 해림현 해남향 조선족소학교 재학
▲52∼57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중 학교 재학
▲60∼63 중국내몽고 야커스감옥 수감
▲63∼73 내몽고 자라이트치 노동개조 농장 노역
▲73 이순선씨와 결혼
▲73∼80 내몽고 포트하치 칭기즈칸농장 노역
▲80∼88 〃 칭기즈칸진에서 영농
▲88∼89·7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이성 안장 거주
▲89∼92 미얀마 라슈 거주
▲92∼94 태국 메홍손 메수야난민촌 거주
▲94·2·4 방콕으로 탈출
▲94·8·12 한국으로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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