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추방→올 재입경 “기구한 인생”/북서 인민학교 중퇴후 탄광노동/불법체류 적발때까지 “가명생활” 북한 벌목공으로 위장 귀순한 박문덕씨(54)사건은 분단 비극의 한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앞으로 비슷한 사례들이 잇따를수 있다는 것을 일러준다.
위장귀순에 이른 박씨의 인생역정은 그가 비록 관계당국을 속인 인물이지만 북한치하를 탈출, 한국에서 살기를 소망한 북한주민이란 점과 함께 동정심마저 자아낸다.
박씨는 40년 8월 황해도 황주에서 출생, 우리의 국민학교인 인민학교를 2년 중퇴하고 탄광노동자로 일하다가 75년 7월 중국으로 탈출했다. 박씨는 연변에서 동포 조선족 여인과 동거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떤 일을 하며 생활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박씨는 91년 4월 동거 여인과 함께 서울에 들어 와 이듬해 불법체류 사실이 당국에 적발돼 추방될 때까지 자신의 실체를 철저히 숨긴 채 생활했다.
박씨가 91년 10월초부터 2개월가량 셋방살이를 한 서울 서대문구 홍은3동의 집주인 림균경씨(69)는『우연히 알게된 중국 교포 조모씨의 소개로 박씨에게 방 한칸을 월세 15만원에 빌려 주었다』며 『박씨는 자신을 정씨, 부인은 「이금자」로 소개했다』고 말했다.
림씨에 의하면 박씨는 중국에서 서울에 자주 드나든 이씨의 친척등을 통해 연변과 하얼빈 등지에서 골동품, 그림, 서예품 등을 들여 와 골동품상에 팔아 상당한 돈을 벌었다. 림씨는 『이씨가 91년 11월 하얼빈으로 다니러 나갈때는 1만달러나 환전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림씨집에 기거하던 91년 11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 5가 통조림 도매상 금옥상회에 중국에서 온 사실 자체를 숨기고 불법취업, 한달가량 일했다. 이 상점 주인 옥모씨(80)의 사위로 당시 상점일을 맡아 본 김동일씨(40)는 『91년 11월말께 점퍼차림의 박씨가 찾아와 「일꾼이 부족하면 고용해 달라」고 해 마침 일손이 달리던 차여서 고용했다』고 말했다. 김씨에 의하면 박씨는 궂은 일이나 젊은 사람들도 힘든 일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평소 말이 없고 특히 자신의 신상이나 고향 등을 묻는 동료들의 질문에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는데다 회식등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주변에서는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박씨는 금옥상회에서 한달가량 일하다가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때 박씨는 「박장걸」로 된 위장 신원을 경찰과 병원에서 밝혔다. 금옥상회에서는 박씨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병원비 일부를 내줬다. 그러나 퇴원뒤 박씨가 다시 찾아오자 불법취업자란 이유로 거절했다.
박씨는 92년 2월 퇴원한 뒤 세든 집에서도 쫓겨 났다. 골동품반입등을 위해 주인집 전화로 연변 하얼빈등지에 국제전화를 자주 해 전화비 1백20여만원이 밀려 있는데다 주인 림씨에게서 빌린 30만원도 갚지 않자 림씨가 『방을 비우라』고 한 것이다.
림씨는『그후 연락이 없다가 92년 9월 친척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박씨가 두고 간 가방을 찾아간 뒤 박씨가 추방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박씨가 입원했던 병원의 진료카드에는 박씨는 교통사고 상처외에는 건강이 좋고 주량은 2홉들이 소주 한병반, 담배 하루 한갑정도라고 적혀있다.
간호사 김순임씨(30)와 원무과직원 김창용씨(54)등은 『박씨는 성격이 얌전했으나 퇴원무렵에는 술을 많이 마셨으며 동료라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다』고 기억했다.【염영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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