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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고개/아흔아홉 굽이마다 설움의 가락(두만강: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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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고개/아흔아홉 굽이마다 설움의 가락(두만강:8)

입력
1994.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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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민들 한숨 사라진채 고갯마루엔 도로확장 굉음만… 강을 건너온 사람들에게 가장 깊게 각인된 설움의 현장은 아리랑고개다. 중류 삼합과 개산둔(개산툰) 중간쯤인 강역마을에서 내륙으로 접어들면 길은 깊고 험준한 산령으로 숨어 든다. 실타래처럼 풀려 있는 아흔아홉굽이. 오랑캐땅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오랑캐령, 가락 슬픈 아리랑을 불렀다 해서 아리랑고개라고 부르는 고갯길이다.

◇특별취재반

권주훈부장대우(사진부)

이준희기자(사회부)

이재렬기자(기획취재부)

 고갯길의 초입은 강변에서부터 20여리나 이어진 버들방천. 수령 1백년을 넘긴 버드나무가 지천이다. 짙게 드리운 버들의 터널로 들어서면 한 세기전 초라한 남부녀대행렬로 이곳을 지나쳤을 초기 개척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굶주린 아이들에게 먹일 게 없는 부모들은 아기버들이었을 이 나무의 그늘아래서 지친 다리를 쉬며 한 움큼 시냇물을 떠먹이곤 먼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황사에 버들개지가 흩날리는 하늘가엔 아직 길 떠나는 자들의 한숨이 가득하고 휘적거리는 가지들은 지나가는 바람을 붙들고 거친 세월의 사연을 전한다.

 버드나무는 각별한 인연으로 조선족의 고난현장에 함께 있어 왔다. 이역의 첫 길목에서 쓰린 가슴을 어루만져준 것도 강변의 실버들이었고 황무지를 일구는 힘겨운 노동을 위로해준 것도 논두렁의 버드나무그늘이었다. 삶의 터전을 두르는 울타리로, 주먹밥이나 나물을 담는 광주리나 소쿠리의 재료로도 버드나무는 유용했다. 조선족과 버드나무의 동고동락은 애초부터 닮은 속성탓일지 모른다. 아무데나 심으면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이 그렇고,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습속이 그렇다.

 길은 실개천과 만났다 헤어지면서 고개를 오른다. 길 한켠의 안내인이 일러준 주막터에는 흩어진 주춧돌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다. 국밥 한 그릇 말아 먹을 형편이 못 되었지만 이곳은 호랑이 늑대등 산짐승에다 재물과 목숨을 앗아가는 비적의 출몰이 잦은 험한 산길을 함께 할 일행을 기다리던 휴식처였다.  고향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과 기름진 땅이 어디인지를 궁금해 하던 유이민들은 이곳에서 장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서로 달랬다.

 10여명으로 길동무를 이루어 주막을 나섰더라도 산굽이마다 돋는 소름을 어쩔 수는 없었으리라. 발길은 무겁고 산길은 멀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하소연하듯 「밭 잃고 집 잃은 동포들아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보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 괴나리 봇짐을 짊어나지고 백두산 고개를 넘어간다(후렴)/ 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벌판을 헤매인다(후렴)」는 「신아리랑」 가락이 흘러나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하릴없이 뿌렸을 것이다. 「북간도」라는 민요도 비슷한 내용이다. 「문전옥답 다 뺏기고 거지생활 웬 말이냐/ 밭 잃고 집 잃은 벗님네야 어디로 가야만 좋을까나/ 아버님 어머님 어서 오소 북간도벌판이 좋답디다」.

 그 가락의 힘을 빌려 고개를 넘는 것은 이주길에 나선 개척민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던 셈이다. 그러나 아리랑가락이 흩어져간 골짜기는 이제 적요한 채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 호젓하다.

 구름이 걸린 고갯마루에서는 도로확장공사가 한창이다. 산허리를 자른채 여러 대의 트럭과 트랙터가 구불거리는 길을 펴고 있었다. 처음 골짜기를 따라 난 오솔길에 50년대 차량이 다니는 비포장도로가 겹쳐졌으니 이번 길은 세번째다. 저 멀리 아득한 용정땅이 손에 잡힐 듯하다. 이쯤에서 낯설고 물선 만주땅 어딘가로 흩어져 가는 개척민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까. 파헤쳐진 길 양옆에는 얼마전 잘려서 밑둥만 남은 아름드리 나무들이 즐비하다.

 아리랑고개의 세월을 지켜온 그루터기에는 지워지지 않는 생채기처럼 박혀 있는 옹이가 풀지 못한 아픔을 간직한 채 완연하다. 아리랑고개의 굽은 길이 곧게 펴지고 나무들이 잘려나간다해도 실향민들의 가슴에는 한이 남듯이.

◎한민족 중국 이주사/19세기말 시작 「1백20년 역사」 현재 2백만명… 97%가 동북 3성 거주

 한민족의 중국이주역사는 청의 봉금령 철회로 대량 이주가 시작된 1875년부터 1백20년이라는 게 일반론이다.  현재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2백만명이 약간 넘는 수준. 중국정부의 90년 통계(제4차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조선족은 모두 2백9만7천9백2명이며 길림·흑룡강·요녕성등 동북3성에 97.1%(1백79만4천7백여명)가 살고 있다.  성별로는 길림성 1백18만1천9백여명(65.8%), 흑룡강성 45만2천3백여명(25.2%), 요령성 23만여명(9%) 순으로 길림성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만 82만1천여명이 산다. 두만강을 끼고 있는 연변에 절반가량이 몰려있는 셈이다.

 조선족은 대체로 두만강, 해란강(용정), 부르하통하(연길), 육도하(명동촌)등 하천주변에 밀집한다. 주로 관개가 필요한 논농사를 짓는 때문이다. 출신지별 분포를 보면 한반도를 거꾸로 접어놓은 꼴이다. 함경도, 평안도사람들은 바로 강건너에 사는 반면 경상, 전라등 남도사람들은 흑룡강성등 내륙쪽에 자리를 잡았다. 강근처 사람들이 먼저 이주를 시작했고 나중에 이주한 남도출신들은 터전을 찾기 위해 북상한 탓이다.

 이주 초창기에는 청의 관리나 국경순라대의 눈길을 피해 산골짜기나 구릉지대등 은밀한 장소를 택해 밭농사를 지었다.  금세기에 들어서 비교적 왕래가 자유로워지자 조선족은 점차 비옥한 평야지대로 진출했다. 기후와 토질탓에 어렵다던 논농사가 만주에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도 이 즈음이다.

 초창기 이주노선은 종성―개산툰―아리랑고개, 회녕―삼합―아리랑고개, 무산―덕화―화룡, 온성―도문, 경원―혼춘등 다섯 갈래로 종성노선이 가장 먼저 이용됐다. 30년대부터는 중국침략에 혈안이 된 일제에 등을 떼밀려 강제이주가 시작되면서 잇달아 개통된 안봉선등 철도가 주요 수송수단이 됐다.

 해방이후에는 50만명이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대부분이 그동안 일군 삶의 터전을 제2의 고향 삼아 3대 또는 4대에 이르도록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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