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1백주년맞아 실질구매가 비교/당시 사회상/국가예산 10%이상 왕실유지비로 사용/국내거주외국인 18만명중 일인 17만명/「양반」절반 충청도 살아… 경북·전북순 쌀의 실질구매가격이 약 1백년만에 5.5배 올랐다. 또 쇠고기는 12.9배, 닭고기는 3.9배, 달걀은 1.5배 상승했다. 통계청이 28일 갑오경장 1백주년을 맞아 당시 의정부등의 기록을 기초로 작성, 발표한 「개화기의 경제·사회상」에 의하면 1898년의 쌀 1가마 가격(서울지역)은 4원, 쇠고기 1근 12전, 닭 1마리 20전, 달걀 10개 8전이었다.
통계청은 통은 가격을 기준으로 디를 현재가치로 환산할 경우 쌀 1가마니는 2만3천2백50억원에 상당하고 닭1마리는 1천1백65원, 쇠고기 1근은 6백 99원, 달걀 10개는 4백66원이라고 밝혔다. 지금의 화폐로 이들 물품을 당시에 사려 했을 경우 이정도의 액수를 지불했어야 했다는 의미다. 이들 품목의 현재 소비자가격은 쌀 1가마 12만7천원, 닭 1마리 4천5백원, 쇠고기 1근 9천원, 달걀 10개 7백6원등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1세기,정확히 96년 전과 지금의 서울 물가를 비교해볼 수 있는 통게다.
임금의 실질가치도 2배이상 뛰었다. 1908∼1910년 당시의 목수일당은 약 82전으로 쌀을 약 1.12말 살 수 있었다. 93년의 건축목공 일당(정부예산기준)은 3만3백원으로 2.57말의 쌀을 구입할 수 있다. 목수일당의 구매력(실질가치)이 쌀값기준으로는 2.3배 오른 것이다.
직업분포에 있어 특이할만한 것은 충청도에 「양반」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 5월 호구조사 결과 양반을 직업으로 신고한 가구주는 모두 5만4천2백17명으로 이 가운데 52.2%인 2만8천3백10명이 충청도에 살고 있었다. 양반가구비율을 도별로 보면 충남이 10.3%로 10가구당 1가구가 양반이었다. 다음으로는 충북 4.5%, 경북 3.8%, 한성부(서울) 2.1%, 전북 1.0%등이다. 그러나 주요 직업별 구성비에서 양반(1.9%)과 함께 관리(0.5%) 유생(0.6%) 농업(84.1%) 등이 별도항목으로 나누어져 있어 「직업으로서의 양반」의 실체가 모호하다. 김경중 통계청통계기획국장은 「자기직업을 양반이라고 신고한 사람은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자」로 무직자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국가예산의 10% 이상이 지금의 청와대격인 왕실의 유지비로 사용됐다. 황제를 모시고 궁정을 관리하는 궁내부예산액이 1896년 57만원으로 전체 에산의 10.3%, 1900년에는 11.5%를 차지했다. 특히 1895년 8월 경복궁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민비)의 장례비로 3년간 지출된 돈은 총 35만5천원(쌀 4만4천3백여섬 상당)에 달했다. 이는 1896년 세출예산총액의 11.6%에 해당되는 학부(지금의 교육부)나 농상공부(농림수산부+상공부)등 1개부처 1년예산보다도 많다.
을사보호조약(1905년)을 계기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차별도 심했다. 주요 행정관서는 물론이고 법원의 요직은 일본인이 차지했고 심지어 근로자의 일당도 1910년의 일본인 판·검사수는 1백83명으로 한국인(71명)의 2.6배나 됐다. 또 공무원봉급도 과장급의 경우 일본인(2천2백7원)이 한국인(6백87원)보다 3.2배 더 받았다. 목수 일당도 일본인은 1원42전으로 한국인보다 1.8배 높았다.
1910년 당시 국내에 살고 있던 외국인 수는 18만4천여명으로 지금(93년 남한 6만7천여명)보다도 11만7천여명 많았다. 일본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17만1천여명이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관리대상이던 음식숙박업소 운수업자 등 개인영업자는 1910년 기준 88개 업종 14만1백36명이었다. 영업자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경기도가 2만7천3백71명으로 전체의 19.5%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으로는 경북 15.8%, 경남 13.0%, 평남 7.6%, 전북 6.4% 등이다. 특이한 업종의 종사자는 대장간 2천3백60명, 인력거꾼 1천8백60명, 유랑연예인 1백6명, 점쟁이 5백7명, 예기(기생) 1천4백4명, 창기 1천4백26명, 작부 2천4백64명 등이다.<이백만기자>이백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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