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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어제·오늘·내일」/주제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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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어제·오늘·내일」/주제강연

입력
1994.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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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평론가이자 전문화부장관인 이어령씨와 시인 고은씨는 25일 상오9시 경주 코오롱호텔 오운홀에서 「한국문학의 어제·오늘·내일」이라는 주제강연을 가졌다. 신라 향가의 흔적이 배어있는 고도 경주에서 두 문인은 월명의 「제망매가」와 융천의 「혜성가」를 떠올리며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격변하는 현실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주제강연을 요약, 소개한다.<편집자주> ◎“새 현실에 맞는 새 문학 잉태하자”/가지·잎·꽃이 함께 건강한 문단돼야/지금은 「즉시의 시대」… 문인 개성 만발기대/이어령 강연요지

 내가 이곳 천년고도 서라벌에서 듣는 것은 목동의 한가로운 피리소리가 아니라 불행히도 월명스님의 한숨소리다. 나는 이 자리에서 월명의 「제망매가」를 소재로 우리 문학의 본질과 현실, 미래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제망매가」에는 「한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 모르겠구나」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오늘날의 문단현실을 그대로 표현한 대목이다.

 한 가지란 한 가족, 한 인간, 혹은 생명을 지닌 하나로서의 만물을 의미한다. 우리 문인들은 떨어질 수 없는 한 가지인데도 극단적인 분열을 거듭해왔다. 그 분열이 무엇이었는지는 내가 이 자리에서 밝히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잎과 꽃이 아닌 가지만을 강조하는 문학, 혹은 그 반대 경우의 문학은 지금까지 우리 문단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해왔다. 가지(이데올로기)만을 강조하는 문학은 잎을 떨어지게 하고 꽃의 향기를 시들게 했다. 제각기 다른 언어와 빛깔을 가진 잎들은 말없이 사라져갔다. 잎과 꽃만을 강조하는 문학 또한 가지를 좀먹어왔다. 정말로 잎과 꽃이 화려한 것은 조화이다. 그러나 조화를 생화보다 더 원하는 사람은 없다.

 잎과 꽃 그리고 가지가 모두 건강한 문학, 즉 한 가지 문학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모든 문인들의 소망이자 목표다. 이제 우리 문단은 참으로 오랜만에 가지와 잎, 꽃을 모두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 이데올로기 대립은 사라졌으며 정치환경은 더 이상 문학환경이 아니다. 기교의 문학 또한 독자의 싫증을 낳고 있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문인들은 몇 가지 새로운 변화를 인식하기 바란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는 즉시(REAL TIME)의 시대이다. 한 예로 수십년전의 쿠바위기를 들고자 한다. 당시 미국의 케네디대통령은 새로운 정보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까지 생각할 잠시의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얼마전의 이라크전쟁은 달랐다. 부시대통령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정보에 따라 아무 시간적 여유없이 결단을 내렸다. 오늘날의 문인들 역시 문학작업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침묵의 시간 혹은 문학적 발효시간이 없다.

 또한 서구의 개인주의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 역사는 세계화로 치닫는 오늘날 우리 문인들에게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을 포함한 동양세계는 불행히도 집단의식에 길들어 있다.

 나는 최근 부레야의 저서 「침묵의 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이책에서 2차대전이 집단주의(일본)에 대한 개인주의(미국)의 승리라고 주장한다. 개인주의는 전쟁중 잠수함전에서 특히 큰 위력을 발휘했다. 수심 몇백 에서의 잠수함에서는 모든 결정을 구성원 각자가 해야 한다. 거기에는 집단이 없다. 향후 시대는 개인주의의 시대라는 점을 문인들은 깊이 인식해야 한다.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도 크게 변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작가는 현실의 재창조자이자 독자의 스승이었다. 독자가 작가를 넘어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PC통신을 보라. 거기에는 독자와 문인이 따로 구분돼 있지 않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이번 모임이 최초이자 마지막이라는 예감에 휩싸여 있다.

 우리 문인들은 이같은 새로운 환경을 인식하기 바란다.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 문학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편·네편 떠나 총체적으로 앞날 고민할때/이념 과잉·부재 모두가 참문학 해쳐/고은 강연요지

이곳 토함산 기슭은 유서깊은 곳이다. 이곳은 3천년 시의 역사가 생긴 장소다.

 우리는 고대신화의 시인들이 자유분방하게 노래하던 곳에 와서 20세기말의 눈으로 한국문학의 어제와 오늘 내일을 확인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신라 신평왕때 일이다. 왜군이 내습할 기미가 보이자 거열랑등 세 화랑에게 괴성이 들리는등 전조가 나타났다. 시승 융천이 목욕재계하고 10구체 「혜성가」를 지어부르니 괴성도 혜성도 사라지고 왜군이 물러났다고 한다.

 이 「혜성가」가 주가임에 틀림없으나 풍류와 현실을 한꺼번에 포착하는 고대의 시적 역량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이 시는 시야말로 순수한 것이고, 시야말로 순수하기 때문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대원칙을 이끌어내고 있다.

 우리의 근현대 문학사 1백여년은 시련에 찬 시대였다. 문학인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근현대사의 시련 가운데서 예외가 아니므로 우리 모두가 시, 소설을 몇십 몇백편씩 쓸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의 한국사람은 심정적으로 거의 문학인인 것이다. 이런 환경에 처한 우리 문학인들은 그들의 문학적 향수까지를 책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문학의 근원에는 과거가 없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발자취를 모범적으로 따라가는 일과는 정반대의 미지에 대한 모험만이 있을 뿐이다.

 설사 문학이 과거의 유산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계승은 당연히 비판적 계승이며 때로는 격렬한 부정의 대상으로 설정되어야 할 계승일 것이다.

 또한 문학에는 완성이 없다. 완성은 이루어지는 순간에 더 높은 단계의 완성을 위해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궁극적인 미완성성의 비밀을 통해서 문학사의 심층은 계승되는지도 모른다.

 1946년 1백명 미만의 문학인들이 모여 조선문학자 대회가 열렸을 때 그 대회가 파한 술자리에서 시인 신석정이 시를 통해 「멀리 떠나버린 벗」들을 떠올리면서 그 모진 세월을 보낸 뒤의 희망을 애써 강조할 때 이용악이 「음! 그 시 좋다」라고 갈채를 보낸 것은 들뜬 취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식민시대 문학인의 실상만이 아니라 그 시대에 문학이 무엇이었던가라는 질문도 서슬푸르게 들어있다. 해방이후 50년의 세월을 보낸 오늘의 한국문학에서도 그 질문은 유효하다.

 동서 이데올로기 체제의 첨예한 대치상태에 있던 한반도는 문학 역시 체제순응에 길들여지거나 그 체제의 모순에 맞서는, 다같이 불행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 이념과잉이나 이념부재는 양쪽 다 진실하고 건강한 문학을 침해한다.

 때마침 냉전체제는 끝났지만 우리는 지난날을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 채 언제나 오늘을 격변의 원인이자 그 결과로서 보내야 하는 비이성적인 삶에 익숙하다. 이제는 누가 내편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문학의 총체적 재인식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나의 예감으로는 앞으로 30년 동안은 체제의 발전을 통한 문학의 변증법적 심화와 확대가 불가피하다. 이 동안 한국문학은 세계문학에서의 어떤 우월성을 획득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열려 있고 닫혀있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이제 세계에는 문화의 상호삼투라는 교향악적 확장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열린 사회일수록 민족들의 고유한 삶의 기억과 관성을 수호하는 일을 폐기해서는 안된다.

 이 유례가 없는 한국문학인대회를 마치고 해산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처지로 돌아가지만 새로운 문학을 잉태한 임부가 되어 돌아가는 길임을 확신한다.

 한 사람은 아름답다/ 두 사람은 더욱 아름답다/ 여러 사람은 가장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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