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도 처음부터 관여 드러나/북 치밀준비판명 북침설불식/러,극비문서전달 이례적… 책임줄이려는 의도인듯 러시아측이 우리 정부에 넘겨준 한국전쟁 관련문서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거나 사실과 다르게 잘못 주장돼오던 많은 부분에 대해 진실을 밝혀주고 있다. 이 문서들은 북한 소련 중국간의 남침 준비과정·작전계획등은 물론 공식 확인되지 않았던 남침경과를 소상히 밝혀주는 고급 정보들을 담고있다. 한국일보는 이번 문서공개로 한국전쟁사가 다시 쓰여져야 한다는 판단아래 전문가를 초빙, 문서공개의 의미와 수정돼야할 부분, 그리고 앞으로의 과제등에 관해 긴급 좌담회를 가졌다.<편집자주>편집자주>
이기탁교수=이번 문서는 2백79쪽에 달하는 본문서 1백건과 부속문서 1백60건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별에 별 의미는 없는 것 같다. 놀라운 것은 러시아정부가 이처럼 중요한 공식문서를 외부에 공개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이다.
본문 1백건은 러시아연방정부의 대통령문서로 되어 있으나 구소련 당시 스탈린이 직접 받았던 당의 공식 문서이다. 부속문서로 분류되어 있는 것들도 외무성은 물론 군참모본부의 기밀문서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이 문서로 북한의 남침사실은 완전히 증명됐다. 모든 전쟁의 경우 휴전협정은 보통 1∼2주 정도 효력을 발생하다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한국전쟁은 지난 41년간 휴전협정 상태로 남아있다. 그간 김일성은 이 군사조약을 평화조약으로 대체하기 위해 미국과 접촉을 시도해 오다 결국 해결치 못하고 사망했다. 전쟁종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쟁책임의 규명이다. 따라서 김일성이 평화조약으로 전환하려고 했더라도 이 전쟁책임이 규명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 이 문서로 한국전쟁 발발책임에 대한 윤곽이 드러났다. 적어도 김일성은 전쟁의 1차적 책임자라는 것이 확인됐다.
홍성태소장=이 문서로 확인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한국전쟁에 대한 중국측의 개입이 훨씬 광범위했었다는 점이다. 중국은 아직까지 「미군이 한국전에 개입, 38선을 넘어 북진했기 때문에 중공군이 개입했다」고 참전이유를 설명하고 있으나 이 문서에 의하면 적어도 49년 초기부터 한국전쟁 계획에 개입했다. 예를 들면 49년5월 북한의 김일이 북경을 방문, 모택동과 중국군내의 조선족 교포부대 3개 사단을 북한의 인민군으로 이관하기로 결정했다는 사항이 나온다. 이들이 인민군의 주력부대가 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스탈린이 50년 2월9일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기까지 계속해서 모택동과 협의를 한 전문이 나오고 있다. 또 50년 5월15일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은 『미국이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만약 참전하면 직접 중국군을 파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김일성의 요청에 의해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북한을 도와주라고 지시한 것 처럼 알려져 있는 전쟁도발 결정과정에서 모택동은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이다.
이교수=국제관례로 볼 때 러시아가 중요한 국가기밀 문서를 우리나라에 전해준 것은 아주 이례적이다. 보통 서방국가들이 30년이 지난 문서를 청서나 백서로 외부에 공개한 적은 있으나 다른 나라에 독점적으로 문서를 넘겨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소련은 1933년부터 38년까지 1890년대 제정러시아정부의 극동관련문서를 공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제정러시아의 극동관련문서를 그대로 30년대까지 이어지고 있어 외교적 고려에서 38년에 중단하고 말았다.
이와같이 소련이나 러시아는 자기들의 국내정책이건 대외정책이건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번에 이를 우리 정부에 넘겨줌으로써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도 외교적 고려가 포함돼있는 것 같다. 러시아가 북한의 반발을 예상하면서도 이를 우리 정부에 넘겨준 것은 어느 정도 한국전쟁 책임을 김일성에게 전가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문서중의 일부분을 공개한 것이며 이 내용중에는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지시한 것보다는 김일성이 전쟁승인을 요청한 대목이 많이 들어있다. 따라서 앞으로 49년이전의 소련 문서가 공개될 경우 45년 2차대전 종전후 50년 냉전시대 개막까지 5년간 소련이 세계정세를 어떻게 보았으며 이를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에 대한 세계전략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홍소장=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번 문서에는 한국전쟁 발발전의 북방3각의 협력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소련이 한국전에 거의 처음부터 개입했으며 중국도 큰 역할을 했다는 증거가 나온다. 또한 군사적인 면에서 침략군 전체가 남침을 치밀하게 계획했던 내용이 상세히 기록돼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어슴푸레 알았던 것을 이번 문서가 뒷받침해준 데 큰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에서 빨치산을 길러내 3천명 이상을 태백산맥등으로 남파했다는 설이 있었는데 이번 문서로 그 내용이 확인됐다. 49년 10월 「빨치산의 활동을 지원하는 것이 좋다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8백명을 다시 내려보냈다」는 기록은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 남침에 대한 치밀한 준비가 행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한 군사적으로 볼 때 소련으로부터 북한에 무기가 도착하는 현황에 대한 자세한 보고, 개전시기등의 협의와 구체적인 승인, 전쟁직전 38선 10∼15부근으로의 인민군 이동배치과정, 남침작전계획을 1개월내로 한 것등 지금까지 간간이 흘러나왔던 내용이 소련의 1차 문서로 증명된 데 큰 의미가 있다.
이교수=이 문서로 북한의 그동안 「6·25는 민족해방전쟁이었다」라는 주장은 허구임이 입증됐다. 북한은 6·25당시 「미제가 북침을 감행, 이를 용맹하게 격퇴했다」는 주장을 당일의 북한방송을 통해 발표, 북침설을 지금까지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 문서에서 볼 때 북한이 적어도 1년이상 군대개편, 무기보강, 대남 정보수집등 치밀한 준비를 해오다 결정적인 시기에 남침을 강행한 것이 분명해졌다. 북한은 처음에는 방어전쟁의 논리를 펴다가 전쟁직후 민족해방을 위한 성전이었다고 논리를 바꾸었지만 한국전쟁이 스탈린의 세계적화 야욕의 시험장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김일성은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야전군사령관에 불과했고 전쟁의 목적은 스탈린이 미국을 시험해 보려는 데 있었다고 보인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전쟁승인을 계속 간청했지만 스탈린은 미국의 개입가능성은 물론 남한의 좌파역량, 빨치산 활동, 남침때 국민반응등을 계속 검토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김일성은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계속 보고했으며 특히 이 과정에서 당시 북한에 와 있던 슈티코프소련대사가 김일성의 편을 들어 준 점이 부각되어 있다.
홍소장=문서 중간중간에 슈티코프대사가 스탈린에게 남한의 북침 가능성을 보고한 대목도 나온다. 스탈린은 이를 가능성이 없다며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지만 슈티코프는 남한에서 월북한 대대장의 신문보고등을 토대로 북침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남한의 신성모국방장관이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라는 등의 허풍섞인 발언등을 근거로 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는 정보였다.
이교수=49년 1월17일 이전의 문서가 공개되지 않아 45년이후의 소련의 세계전략과 한국전쟁에서의 소련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분명히 한국전쟁은 미소간의 세계전쟁이었지만 그후 전개된 과정은 「제한전쟁」으로 바뀌었다. 이 전환이 중요하다.
이 전환은 소련의 외교정책전반을 파악해야 가능하다. 스탈린은 2차대전때 북해도를 점령하려다가 미국의 완강한 반대때문에 실패했다. 소련은 우선 한반도북부에서의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소련군 대위였던 김일성을 수괴로 내세웠다. 그러나 중공이 49년 중국을 통일하면서 극동에서의 잠재적 강자로 떠올랐다. 스탈린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한을 치게해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극동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다. 스탈린은 남한을 적화하면 일본까지도 중립화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자기 군대는 보내지 않으면서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때마침 미국이 한반도를 그들의 방위선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하자 스탈린은 호기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스탈린은 그 시기를 기다리다가 미국이 한반도를 포기한다고 하니까 냉전시작 직전에 서방의 약한 부분인 한반도를 팔꿈치로 슬쩍 건드려 본 것이다. 스탈린은 한반도 적화가 성공하면 미국이 독일까지도 포기해 이곳도 적화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홍소장=이 문서를 볼 때 안타까운 것은 북쪽에서는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을 당시 우리측은 전쟁 전날밤까지도 장교클럽 개장식 파티를 여는등 무사태평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쟁 열흘전에 대폭적인 장교인사를 단행했고 무기를 정비한다고 전방에 있던 주요무기를 후방으로 보내는등 전쟁에 대한 대비가 전혀 안되어 있었다. 왜 이러한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났는지 앞으로 더욱 규명되어야 한다.
이번 문서로 볼 때 김일성은 남한내에 엄청난 첩보조직을 통해 남한의 주요 정책결정을 샅샅이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50년1월6일 남한의 고위정책당국자들이 모인 비밀회의에서 『영국이 곧 중국을 승인할 것이며 전세계가 이를 따를 것』이라고 말한 내용이 1월29일 북한이 스탈린에게 보내는 보고문서에 그대로 나와 있다. 따라서 김일성이 남침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판단은 당시의 상황으로 봐서는 거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다만 박헌영등 남로당측이 주장한 『남침하게 되면 남쪽의 인민들이 봉기할 것』이라는 예상이 빗나갔고 트루먼대통령의 극적인 참전결정이 결정적으로 남침을 실패하게 만든 돌발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정리=남영진기자>정리=남영진기자>
◎“전술과정만 공개… 미진부분 많다”/구소 세계전략·김일성선택이유 등 불명
러시아가 건네준 이번 문서로 한국전쟁의 남침사실과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의 공모사실등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많은 부분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직도 공개돼야 할 내용이 많다.
이교수=6·25는 김일성이 도발한 한반도 내전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2차대전 후 소련공산주의의 세계적화라는 거대한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 공개된 문서가 한국전의 전술적 내지 전략적 과정을 규명하는 데는 많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소련이 어떤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이 전쟁을 이끌었는가라는 보다 차원 높은 정치적 이유를 규명하는 문제는 여전히 베일 속에 남아있다.
2차대전이 끝난 후의 소련 극동정책이 무엇이었는가를 알아야 소련의 전쟁목적을 알 수 있으며 한반도에 대해 소련이 과거 제정러시아정책의 맥락속에서 파악해야 한다.
홍소장=가까운 문제로 소련이 김일성을 어떤 경로를 통해, 왜 북한통치자로 내세우게 됐는지가 이 문서에는 나타나 있지 않다.
김일성은 1945년 해방 전까지 소련 연해주에 있던 소련군 제88독립정찰여단의 대위로 있었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이미 증명된 것이지만 당시 김일성보다 계급이 높았던 소령급의 인물도 있었다. 소련이 왜 어떤 과정을 통해 하필 김성주라는 33세의 인물을 선택해 북한공산당위원장으로 입북시켰는지가 의문에 싸여 있는데 이것을 추측할 만한 문건이 하나도 없다.
이교수=러시아라는 특수한 입장에서 보면 자기 나라에 결정적으로 불리하다고 생각하는 문서를 쉽게 내놓지 않으려 할 것이다. 러시아의 문서창고를 열면 확실히 드러날 수 있는 사항들은 많이 있다. 이중의 하나가 45년 직후 소련의 대미전략과 세계적화전략이다.
우선 미국은 1946년 한반도정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되는데 트루먼대통령이 소집한 국가안보위원회가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검토한 결과 3가지 이유로 별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 첫째 이유는 군사예산을 기존의 10분의 1로 줄이고 둘째는 차기 전쟁이 터진다면 유럽 특히 독일에서 터질 것이라는 점, 셋째 한반도는 지역적으로 군수보급활동이 극히 어렵다는 점이다.
이 결정에 대해 소련은 분명 미국이 포기한 한반도를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 하는 정책토의를 거쳐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이 1946년의 결정에 비춰 보면 트루먼이 6·25 직후 개입전환을 한 것은 돌발적인 사건이지만 소련의 한반도전쟁 계획은 절대로 김일성의 청원에 의한 즉흥적인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홍소장=이번 문서로 지금까지 증명되지 않았던 주장들이 사실로 입증되고 있는데 김일성이 어떤 경로를 통해 소련에 의해 선택됐느냐는 문제는 북한의 전쟁책임이상의 부분까지 밝혀줄 수 있는 고리가 되기 때문에 다시 한번 문서공개를 기대해 본다.
그간에 나와 있는 설중에서는 김일성이 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스탈린의 구미에 맞았다는 증언도 있다. 김일성은 어릴 때 만주에서 중국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국어에 능통했던 것도 사실이고 만주에서 항일무장운동을 하기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김은 30년대에 중공군 8로군의 지파인 항일연군에 편입됐고 30년대말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자 소련으로 넘어가 소련군의 88여단으로 재편성됐다. 이때 그는 소련군간부와 빨리 접촉했다는 것이다. 88여단은 중국인과 한국인의 혼성부대였고 출신성분도 모두 각색이어서 소련군은 이 부대의 동태파악을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김일성이 이 부대의 내부사정을 소련극동군 비밀경찰책임자인 솔로킨에게 소상히 보고해 신임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을 밝혀줄 수 있는 관련 문서들이 더 나오기를 기대한다.
□참석자
이기탁교수 연세대·국제정치학
홍성태소장 한국전략문제연구소·예비역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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