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후의 북한 공산체제가 단명할 것인가, 장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한창이다. 그러나 그것은 김일성이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결판나버린 무의미한 주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의 공산체제는 8일새벽 이전에 벌써 죽어 있었다고 해야 옳다. 길고 긴 경제파탄의 악순환 속에서 주체사상은 공허한 수사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거기에는 생존과 실존의 의미를 밝혀 주는 철학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고 정책대안을 생산해 내는 창조적이고 신축적인 이론이 부재하다.
이처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북한의 공산정권은 이미 죽어버린 체제다. 이상향을 설계할 상상력을 상실한 평양의 지배층은 권력에만 매달리는 초라한 기득권 계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인가. 이미 생명을 다한 북한 공산체제에 정당성의 화환을 걸어주려는 조문외교가 주변 열강 일각에서 벌어지고 체험으로 주체사상의 파산을 익히 아는 북한 공산당은 일사불란하게 김정일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 공산정권의 반민족성과 반민주성을 질타해 온 한국정부조차 별다른 설명없이 김정일 후계체제를 인정할 태세다.
그러나 북한 안팎의 이러한 정치적 동향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체제의 「심장」이 멈춘 상태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념이 무너진 다음에 남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권역욕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식으로 남북통일이 이루어질 지 모른다는 공포를 자아내면서 북한 공산당을 결속시키고 개혁 대 보수라는 내부 분열의 형성을 저지하고 있다. 독일식 통일로 권력을 상실하면 2등 시민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는 위기의식으로 지배층 전체가 결박당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체제경쟁에서 승리한 한국의 존재 그 자체가 김정일의 권력장악을 지원해주고 있다.
한편 한미일 3국은 카터의 방북으로 잠시 찾아온 대화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는 것이 절박한 과제다. 반면에 중국은 변방의 동맹국가가 무너지면 동아시아에 혼란이 불어닥칠 것이 걱정이다. 남북한 당사자와 주변 열강은 서로 다른 최악의 시나리오를 그려 보면서 북한의 안정이라는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지금 중·단기 전략을 동시에 개발하고 강온 양면작전을 구사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북한의 핵개발을 저지하려면 국제적 공조체제와 군사적 안보태세를 강화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반면에 북한은 개혁의 필연성을 인정해야 한다. 주체사상의 사망을 공식화하면서 시장체제의 건설에 나서지 않고서는 제 아무리 원조를 확보한다 해도 위기가 가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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