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목적외 개인적 주문 많은듯/간부접견땐 아낌없는 시간할애 김일성사후의 북한을 통치하게 될 후계자 김정일은 최대의 해외조직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의장 한덕수)중앙본부와도 자금원 조달등 김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총련은 「전 재일조선동포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변에 집결시키자」는 강령을 내걸고 지난 55년 5월15일 결성돼 그간 김부자에게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며 북한의 경제적 파이프 역할과 문화선전의 전위대로서의 임무를 차질없이 수행해 왔다.
경제대국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도 중심가인 지요다(천대전)구에 중앙본부를 둔 조총련은 일본의 도도부현등 행정단위마다 3백개의 지부를 운영하고 있으며 1천8백개의 분회까지 결성, 외국인단체로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규모의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산하에 민주여성동맹, 청년동맹, 상공회등 16개단체를 두고 있으며 조선통신사를 비롯한 통신, 보도, 출판사와 조·일수출입상사, 금강산가극단 등 17개의 사업체, 그리고 조선대학교를 정점으로 한 1백54개의 민족학교까지 있다. 조총련은 결성 40주년을 앞둔 현재 일본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단체로 성장했다.
북한당국은 조총련을 외화조달의 「화수분」으로 간주, 직간접적인 송금을 강요하고 수시로 조총련간부를 불러들여 여러가지 사업과 공작지시를 내려 왔다. 이 지시는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전해져올 경우도 있지만 80년대 이후에는 대부분 김정일이 직접 관리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생존시에도 실제 조총련을 조종하는 주역은 김정일이었다는 것이다. 공식석상에 얼굴을 내밀기 싫어하는 성격의 김정일이 조총련간부만은 예외적으로 반드시 만나 두터운 애정과 신뢰를 표시해 온 것이 단적인 증거다. 올들어 김정일의 공식활동은 불과 6회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흔한 공장이나 농장의 현지지도, 외국빈객의 접견은 한 건도 없었다. 심지어 카터전미대통령이 방북했을 때조차 얼굴을 내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손꼽을 만한 6번의 공식행사중 지난 2월 28일 조총련 책임부의장 허종만을 접견한 것을 비롯, 4월25일에는 이진규 조총련제1부의장을 만나는 등 조총련고위간부는 두차례 만나 아낌없이 시간을 할애했다.
김정일이 조총련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는 것은 북한경제에서 차지하는 조총련의 공헌도가 가장 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취미인 영화와 음악감상 등에 필요한 음반이나 첨단오디오, 영화관람기재 등을 주로 조총련을 통해 들여 온다는 개인적인 이유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외부인을 접견할 때는 악수 정도만 교환하고 그다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것으로 전해지지만 조총련고위간부와의 회견은 1시간 이상을 넘겨 개인적인 필요나 요구 등 은밀한 주문과 당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허종만책임부의장이 김정일의 「충복중의 충복」으로 고령과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명목상의 의장 한덕수보다 실세라는 것은 조총련내에서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허부의장은 지난달 일본의 TBS TV와 가진 1시간여의 회견을 통해 김정일의 영명함과 지도력을 끝없이 찬양, 북한에 후계체제가 확고해진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 일으켰을 정도였다.
김정일은 북한의 경제사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하자 지난 88년 8월에도 허부의장을 평양에 불러들여 조총련산하 조선신용조합의 예금잔고를 확인한 뒤 『헌금을 1조엔까지 끌어 올려라』고 직접 지시한 일도 있다. 이 지시를 받은 조총련은 5백억엔을 모집할 방침을 세우고 빠찡꼬점과 호텔 등을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물론 기업설립과 이사 등의 명의는 다른 사람을 내세웠지만 내용은 조총련의 직영사업이었다. 실제로 지방본부의 부위원장이 빠찡꼬점을 운영, 연간 1억엔의 수입을 올린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내 북한전문가들은 점차 어려워지는 북한의 경제사정으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조총련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며 이에 따라 김정일의 충복으로 알려진 허종만부의장의 지위도 격상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도쿄=이창민특파원>도쿄=이창민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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