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적 저항… 아이티 뒤발리에 비극적 종말/대만 장개석장경국총통 드문 성공사례로 북한의 권력체계가 김정일당비서겸 국방위원장 후계구도로 굳어져감에 따라 공산주의 사회에서 처음으로 부자세습이 이루어지느냐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서구 근대시민혁명후 절대왕정이 무너진 뒤에도 권력세습은 간간이 있어왔지만 세습에 의한 정권이양은 국민과 권력내부로부터 커다란 저항을 받아왔다.
다만 국민의 신임을 얻은 대만의 장개석·장경국부자만이 20세기이후 유일하게 권력세습에 성공한 예로 꼽히고 있다.
장개석은 1928년 7월 군벌을 일소, 중국을 통일하면서 국민당 정부의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장은 모택동의 공산세력에 쫓겨 49년 12월 7일 대만으로 밀려난 뒤 초대 총통에 선출됐으며 72년 5선을 거쳐 75년 4월 87세의 일기로 사망할때까지 국부의 지위를 누렸다.
장의 사망후 부총통인 엄가금이 총통을 승계했으나 실권은 장이「나라를 경영한다」는 뜻으로 작명해준 맏아들 장경국행정원장(총리)이 장악했다.
장경국은 59세때인 69년 행정원부원장으로 중용되면서 사실상 후계자리를 굳혔으며, 72년부터는 행정원장 국가총동원위원회주임등 요직을 겸임하며 사실상 1인자로 부상했다. 장경국은 부친사후 3년만인 78년 2월 신임총통으로 정식취임한 뒤 84년 재선됐으며 임기를 2년 앞둔 88년 1월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장경국은 부친만큼의 카리스마는 없었으나 「장경국십계명」으로 불리는 강력한 부정부패추방운동과 함께 경제를 부흥시키고 87년에는 계엄령을 철폐하는등 민주개혁을 실천했다. 장경국은 특히 당과 군부내 요직에 대만출신을 대거기용하고 대만출신의 이등휘를 발탁, 총통자리를 잇게 했다.
한편 싱가포르의 이광요전총리도 재임중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세계최장수 민선총리로 31년간이나 집권하며 싱가포르를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선두주자로 부상케 했던 이전총리는 59년 총리로 취임한 뒤 경제번영을 이룩한 업적으로 국민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다 67세때인 90년 11월 명예퇴진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후계자인 오작동부총리가 총리에 취임, 이전총리의 장남인 이현룡통상장관(42)을 부총리로 임명해 오작동은 권력세습을 위한 과도인물이라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이현룡은 혈연주의배격을 강조한 이광요의 지론과는 달리 30세에 군참모총장을 지냈으며 32세때인 84년에는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이후 세습논란을 일으키며 국방장관 상공장관으로 승승장구하며 착실히 후계자수업을 받아왔다.
종신대통령제를 실시하며 부자세습으로 아이티를 29년간 통치했던 뒤발리에부자는 국민들의 민주화요구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는 자신의 묘가 파헤쳐지는 부관참시를, 아들은 외국망명의 비극을 당했다.
57년 집권한 아버지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64년 자칭 종신대통령으로 군림한 뒤 71년 당시 19세인 아들 장 클로드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후 대통령 피선거권을 40세에서 20세로 낮추는 동시에 아들의 나이도 21세로 올린 프랑수아는 국민투표를 통해 이를 인정케 했는데 당시 투표결과는 2백39만1천9백16대 0으로 발표됐다.
2주후 대를 이어 취임한 클로드는 집권후 야당 불법화, 비밀경찰을 통한 국민탄압등 폭정을 계속하다 집권 15년만인 86년 2월 민중봉기를 맞았다. 그는 할수없이 프랑스로 극비 망명길에 올랐다.
루마니아를 25년간이나 통치하다 89년 12월 부부가 함께 공개처형된 차우셰스쿠전대통령도 82년 4월 김일성주석생일때 평양을 방문한 뒤 차남 니쿠를 후계자로 지목하며 정치국원과 청년부장관을 맡겼으나 아들도 시위대에 대한 발포명령하달 책임으로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돼 권력이양이 수포로 돌아갔다.<이종수기자>이종수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