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시대인 요즘은 어떤 사태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도 즉각적이다. 김일성 사망도 그랬다. 「25일 정상회담」 무산의 아쉬움, 상황의 불안감, 정보수집력등이 주된 내용이었다. 불안감은 정보부재에서 온다. 지구촌 어디라도 위성통신으로 연결돼 동시정보를 얻는데 서울에서 불과 수십 떨어진 북한 일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분단 49년간 폐쇄로 일관해온 북한사회 탓이 크지만 남북한은 그만큼 이질적인 사회를 살아왔다. 일본의 연감류는 남북한 공용어를 한국은 한국어, 북한은 조선어라고 쓰고 있다. 과장이지만 소름끼치는 일이다.
동질성을 되찾을 교류나 개방에 저항해온 김일성의 죽음에 접하여 필자는 통독을 생각해본다. 90년10월3일의 통독은 우리 눈에 아주 빠른 것이었다. 불과 1년전의 베를린장벽붕괴가 부각된 탓도 있으나 우리가 독일이 기울인 동질성유지 노력을 너무 몰랐던 점도 있을 것이다.
동서독은 1972년 12월21일 선린우호 무력사용중지 상호주권인정등 10개항의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서독 언론사는 동독에 특파원을 두었다. 외무장관이었던 겐셔씨는 「양독 기본조약은 서로를 분리시키는 요소들은 제쳐 놓은채 시민들의 이익에 부합되는 실질적인 협력이 모든 이념적 정치적 대립을 초월할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90년 한국일보에 술회했었다.
실질협력은 20년간 끈질긴 「작은 걸음」으로 추진됐다. 서신왕래 소포교환 전화통신이 이루어졌다. 특히 매년 동서독시민 8백만명 가량이 양국을 방문했다. 동독주민의 90%가 서독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동독시민들은 동서독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았다. 그래서 서독 매스컴은 통일에 가장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는 내왕은 물론, 편지교환도 안되는 데탕트의 소외지대에 살고 있다. 텔레비전은 방영방식도 다르다. 정부차원에서 못하니까 이산가족들이 직접나서 북에 둔 친지의 생사확인과 편지교환을 위해 중국등지의 사설중계업자에게 수백만원의 비용을 들인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10일 공보처의 국민여론조사결과 김일성사후 「통일이 빨라진다」는 견해가 44.3%,「늦어진다」는 전망이 40.1%였다. 이렇게 엇갈리는 것은 모르겠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판단근거가 될 북측 정보의 절대부족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통일될지 점쟁이가 아니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통일은 결코 거저 오지 않는다.
북한의 변화는 화석같은 김일성의 사후에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 학자들이 있었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가 세상을 뜬 것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변화를 그의 생전에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를 이을 북한지도부는 민족동질성회복을 위한 「작은 걸음」을 마련하는데 우리와 함께 노력해야 할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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