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7월25일! 민족분단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남북의 정상이 만나는 날이다.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다. 그동안 5, 6공시절 남측에서 일방적으로 몇 차례나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그를 위해 밀사도 보냈으나 북측이 응해오지 않았다. 김영삼정부도 작년 2월 취임사에서 이미 정상회담을 제안해 놓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번 정상회담은 남측의 제안에 대한 북측의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북측이 회담의 성사를 결심하고 나섰고 남측이 회담정례화와 장소에 대한 확답을 고집하지 않은 여유를 보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솔직히 말해서 남측은 5, 6공이래 지금까지 확고한 목적없이 정상회담에 지나치리 만큼 집착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북측은 한 번의 제안으로도 극적인 효과를 누릴 수 있지만 남측의 수락은 당연한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북측은 이 시점에서 왜 정상회담을 결심했을까? 정상회담에서 북측은 무엇을 얻으려고 하며 남은 북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여권은 일단 만남 자체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고 야의 일각에서도 정상회담으로 전쟁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일반국민은 기대반 우려반이다. 특히 우려하는 쪽에서는 북한이 국제적 제재를 피하기 위한 미봉책, 지연작전을 쓰고 있다는 냉소적인 반응이다. 그들에 의하면 북한당국의 어떠한 변화도 그것은 근본적인 전략변화가 아니라 전술적인 국면전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관적인 현실주의의 관점은 지금까지의 남북한관계의 경험에서 보면 크게 틀린 것이 아니나, 급변하는 주변정세 속에서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도움이 되는 긍정적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뿌리깊은 대북불신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이 기회에 북한의 전술적 변화의 의미를 좀 더 객관적이고 분석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원래 변화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부터 시작하며 그 전술적 변화의 축적과 심도에 따라 전략의 질적 변화도 가능하다. 우리도 그러하듯이 북한이 스스로 그들의 「국시」를 포기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국시에는 그들의 이념, 세계관, 전략적 관점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체제유지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다. 오늘날 북한이 심각한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 속에서도 버티고 있는 것은 그나마 체제유지를 위한 목적, 합리적 선택능력이 있기 때문이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우리는 북한정권의 행동반경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가지는 것과 핵개발을 포기하는 것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오직 그들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바야흐로 북한은 이 고통스러운 핵의 딜레마에서 탈출하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만약 8일 열리게 될 제네바 북미고위급회담에서의 핵논의가 한국과 미국, IAEA가 만족할 정도의 수준으로 진행되면 이 변화는 비록 전술적 차원의 것이라 하더라도 의미있는 청신호로 봐야 한다.
그런데 만약 제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북측이 「10대 강령」, 연방제등의 통일논의만을 고집하고 핵문제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유보할 경우 정상회담 자체가 일회성으로 끝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7천만 동포는 물론 전세계의 빈축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북한이 1차 정상회담에서 남북합의서의 비핵화선언을 재확인하고 대화를 통한 평화공존의 길을 분명히 선택하기를 바라며 그 길이 북한의 체제유지에도 결과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 길은 통일에는 시간이 걸릴지 모르나 북한도 살아 남을 수 있고 민족상잔의 전쟁 재발도 막을 수 있는, 실현가능한 최선의 길이다. 이번에 핵문제를 남북한과 미국의 대화로 해결하고 남북경협과 주변국의 대북한 국교교섭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리라는 전망이 확실해지면, 남북한의 정상은 1947년 3월 트루먼선언에 의해 본격화된 동서냉전의 종말을 고하는 세계사적 드라마를 연출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는 지금 제1차 정상회담을 계기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향한 긴 터널의 입구에 들어섰다. 동·서독이 1970년 3월 첫 정상회담을 시작하여 20년이 지난 1990년 10월 통일이 되었고 남·북예멘은 1972년 11월 첫 정상회담을 열어 18년만에 통일을 이룩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 전쟁에 의한 통일은 현실적으로 북의 급속한 붕괴와 남의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공멸을 초래할 수도 있다. 표현은 다르지만 남북한간에는 공통의 이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북은 체제유지, 남은 평화공존이 당면 목표라고 볼 때 남북한의 지도자가 투철한 역사의식과 현실감각으로 대타협을 이룩한다면 민족공영과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은 큰 줄기를 잡아 밀어 붙이는 돌파력이 탁월하며 우리는 이미 대문을 활짝 열어 놓은 상태다. 철문(철문)의 열쇠를 틀어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북한의 김일성주석이다.
우리 국민은 환상과 환멸, 흥분과 냉소의 오랜 타성을 떨쳐 버리고 성숙한 국민통합으로 남북정상회담의 성사를 위한 건설적인 압력과 동시에 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고려대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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