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심한 일이다. 선진 대열에 서서 험난한 근대의 역사를 앞서 개척해온 서구에서 조차 민족갈등이 확산되고 있다. 심지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줄 알았던 극우의 인종 차별주의마저 여기저기 나타나고 이방인에 대한 테러가 빈번히 자행되는 실정이다. 게다가 극우는 파시즘의 종주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다시금 정치적 정당성을 회복해가고 있다. 지난달에 출범한 베를루스코니의 내각에는 무솔리니 시대의 「영광」을 그리워하는 5명의 민족동맹 인사가 포함되어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서구는 민족을 넘어서는 지역공동체의 건설에 나선지 오래다. 그런데 EU의 창설로 탈민족의 기운이 한층 더 강력해지는 지금 극우의 이념이 부활하고 있다.
무엇 때문인가. 지역 차원의 단일 시장이 태어나 「국경」이 무너지면 삶은 더욱 불확실해지고 생존경쟁의 문제는 심각해진다. 아울러 낯선 이방인이 이주하여 사회의 동질성을 파괴하면 정체성의 위기가 불어닥치기 마련이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가 더이상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이목구비등의 가시적인 차이로 편을 가르고 민족이라는 친숙한 동질성에서 안식처를 구하는 국수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사회 일각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는 것은 이때부터다.
그렇다고 당장 위기상황이 펼쳐지리라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진보적 지식사회는 마르크시즘의 보편성과 국제주의 전통을 지켜가면서 극우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한편으로 일반 대중은 지난 9일과 12일에 치러진 EU의회선거에서 사회당과 기민당 계열에 절대다수 의석을 선사하고 극우의 준동을 견제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과 프랑스는 단순히 자국 국민의 이성에만 기대를 걸지 않고 국수주의 자체를 제거하기 위한 개혁에 나서고 있다.
한국의 「진보」중 일부는 국수주의와 대결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서구의 진보와 닮지 않았다. 오히려 민족이라는 신성한 광력에 눈이 멀어 마르크시즘의 보편성과 국제주의의 전통을 상실하고 만 기형아다. 김일성의 주체사상까지 모방하려는 경향이 우리의 민중운동 일각에 있었던 것이 불과 몇년전의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의 문민시대에 다시 나타날 조짐이다.
지난달 30일 제2기 출범식에서 한총련이 작성한 선언문은 국수주의적 수사로 가득차 있고 고려연방제 통일노선에 대한 지지일색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한 사고는 자멸적인 행동을 부추기고 있다. 남총련은 UR의 비준을 반대한다면서 극렬시위를 벌였고 한총련은 「학생 대표」를 평양에 파견하여 통일을 논의할 태세다.
우리의 진보는 본래의 자리를 찾아가야 한다. 이성을 흐려놓을 위험이 다분히 있는 「민족」과 「주체」의 수사학 대신 인권의 보편적 언어를 구사하는 자세로 말이다. 그렇지 않을 때 불행해지는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한국의 진보 역시 시련과 방황의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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