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에 드는 김영삼대통령의 발길이 내친김에 통일로 이어지는 첫 행보가 되길 비는 염원이 무심한 산하에도 담겨졌기 때문일까. 남북정상회담 개최의 낭보가 전해지며 불로청산 장존록수에도 생기를 더하는 듯하다. 격변의 여울목에 서서, 연전 중국의 중원일대를 여행하며 피가 끓던 한 기억을 짐짓 되새겨 본다. 하남성의 개봉에서 정주를 거쳐 낙양으로 향하다 황하변 삼국지 서막의 격전지 호뇌관을 찾는 순간 가슴부터 쿵쾅거렸다. 호뢰관은 오로지 초패왕 항우만이 일합을 겨룰 수 있으리라는 봉선 여포가 천하제일인 마술·궁술 그리고 방천화극 다루는 솝씨를 맘껏 뽐내던 곳. 때는 서기 190년. 「폭도배」 동탁이 후한의 정권을 농단하자 원소를 맹주로 한 조조·손견·공손찬등 18로 제후는 의와 충 깃발아래 타도동탁을 선언한다. 놀란 동탁은 의자 여포를 호뢰관에 보내 혁신군을 막게 하니 천부부당 만부부당한 그의 용력은 오로지 조조캠프에 의지해 있던 유비 관우 장비 삼의형제가 가까스로 물리칠 수 있을 뿐이었다. 오늘날에도 호뢰관에는 여포성의 유지가 있어 그 점장대에 오르면 천군만마의 함성이 일어 금방이라도 장대무비의 황토벌판을 몸서리치도록 뒤흔들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또 호뢰관에는 이 전투를 통해 비로소 일약 삼국지 무대의 스타덤에 오른 유·관·장의 종횡무진한 활약상이 삼전려포등 주제로 무궁무진 전해지고 있다. 「한날 한시에 죽을 것」을 맹세하던 삼의형제들의 무용담에 한껏 고무된 감흥은 그러나 하남·개봉도서관 일우에 소장된 백제의 마지막 의자왕의 셋째아들 부여륭(615∼682), 고구려의 연개소문 맏아들 천(연) 남생(634∼679)의 묘지를 보는 순간 일시에 산산이 부서진다. 부여융은 부왕의 어지러운 정사로 660년 나라가 망한후 함께 낙양으로 압송돼 왔었다. 남생은 개소문이 666년 죽은후 대막리지의 벼슬을 이어 국정을 총리했다. 그러나 남건·남산 두 동생이 「어수와 같이 화목하라」는 선친의 유언을 저버리고 권좌를 찬탈했다. 남생은 당나라로 귀순해 원조를 청했고 나당연합군은 내홍을 노려 평양성을 함락시키니 668년 통일신라가 탄생했다.
묘지는 1920년대에 낙양 북쪽 교외 북??산에서 출토됐다. 이들 외에 남산과 백제의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흑치상지·준장군 부자등의 묘지도 인근에서 함께 출토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점장대, 묘지들은 유비가 창안한 고사성어 수어지교가 보편적인 삶의 가치인 나라는 흥하고 국력이 사분오열된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는 교훈을 따갑게 깨우쳐 들려주기 위해 그곳 만장을 뒤덮는 황사속에 천년이 넘도록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통일부장>통일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