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1년여 동안 친재벌정책을 써왔다. 친재벌정책은 한편으로는 정부가 재벌을 앞세워 경기를 부양하려는 데서 나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정책의 최종책임자들이 주로 재벌기업들과 어울려 그들이 주입한 경제적 사고를 그대로 받아들인 데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최근 경기가 되살아나고 여론이 친재벌정책을 비판하자 정부는 재벌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삼성의 승용차 시장진출이 막혔고, 공기업의 민영화방식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또 대통령은 기업을 탄압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특혜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뒤늦은 감은 있으나 일단은 환영할 만한 조치들이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그동안 재벌은 공룡처럼 비대해져서 경제적 효율을 저해했고, 경제력이 정치권력과 연결되어 각종 불균형을 산출하였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위협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벌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조정은 전향적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친재벌정책을 믿고 사업확장을 계획하였던 재벌기업들은 투자를 일시나마 주춤하게 되었고, 신나게 민영화를 부르짖던 관리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 그리고 정작 기뻐해야 할 중소기업들은 정책방향의 선회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도 이런 정도의 제스처는 얼마든지 있었다면서 말이다.
이와 같은 현실은 그동안 정부가 일관된 재벌정책을 갖지 못한 결과 생긴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의 문제는 정부의 재벌정책이 얼마나 즉흥적인 것이었나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영효율화를 위해 민영화를 시도하였다면 그 대상은 당연히 부실한 기업이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제팀이 제출한 민영화 대상기업은 오히려 건실한 것이 많았다. 이는 수평팽창을 노리는 재벌기업에는 더없는 호기였다. 막상 이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재벌들은 정부가 투자마인드를 저상시키고 있다고 불평이다. 이러한 불평의 무마책인지는 몰라도 재벌의 이권을 보장하는 사회간접자본의 민자유치법이 약간의 손질만을 거친채 경과위를 통과하였다.
정부가 방향을 잘못잡은 것을 인식하고 바로 잡으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그 시도가 부분적이고 일관성이 없어 효과는 축소되고 오히려 혼란만을 가중시킨 결과가 되고 말았다. 과연 정부의 대재벌정책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혼돈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증가가 우리 경제에 부담을 지워줌은 물론이다.
우리는 확고하고 일관성있는 재벌정책을 필요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벌에 관한 탄탄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행히도 종래의 재벌에 관한 연구는 탁상공론에 그쳤거나 너무 재벌옹호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노던 일리노이대학 권진균박사의 재벌에 대한 처방은 옳고 그름을 떠나 구체성이 돋보인다. 권교수는 우선 공정거래위원회를 대통령 직속 부총리급의 재벌개편위원회로 대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재벌문제는 체제문제이므로 단순한 공정거래조치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소유집중 그리고 소유와 경영의 결합을 한국재벌체제의 기본문제로 지적하였다. 특히 소유집중을 가장 큰 문제로 삼고서 재벌에 대한 조치는 소유분산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안한 주식 분산의 한 가지 방법은 재벌기업들이 은행에 지고 있는 부채의 과반수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은행들은 새로 전환된 주식을 재벌개편위원회에 위탁하여 단계적으로 판매케 한다. 처분방법은 금융기관 주식보유, 종업원에게의 유상분배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 작업을 통해 환수된 자금은 재벌개편시책이 야기할 수 있는 경제적 부작용을 방지하는 작업에 투입할 수도 있고, 나아가서는 국제경쟁력 제고를 위한 기술개발자금으로도 쓸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경기부양정책에 비해 인플레이션을 야기하지 않으며 효율적으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추가적인 통화증발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존자금 사용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권교수는 여러가지 소유분산책을 제시하였다. 그의 의견에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많으나 받아들이기 힘든 이상론도 많다. 그러나 재벌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하고 구체적인 처방을 내린 것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한 초석을 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누가 무어라 해도 한 가지 확실한 대전제는 재벌은 현재보다 비대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확고한 재벌정책이 수립되기 전이라도 재벌에게 가는 각종 특혜를 불식하고 과거에 진 빚을 제대로 갚게함과 동시에 꾸준하게 공정한 게임 룰을 적용하면 재벌산하의 많은 기업들이 창조적 도태를 할 것이다. 이것은 효율성을 제고시킴과 동시에 재벌의 문어발을 제거하여 경제력 집중을 해소시켜 줄 것이며 중소기업과 대기업간의 효율적 분업체제 정립에도 일조할 것이다.
재벌정책은 다른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일관성있게 추진하여야 한다. 좋은 것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니다 보면 아무것도 챙길 수 없다. 일관된 재벌정책이 아쉽다.<서울대교수·경제학>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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