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월드컵 본선의 첫 시합에서 우리 선수단은 마지막 순간의 절묘한 슛 한 개로 거의 진 것이나 다름없던 경기를 무승부로 끝냄으로써 이어질 경기에 대한 희망의 불씨를 살려냈다. 승리의 쾌감보다는 새로운 기대감이 보다 큰 국민적 열광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북한핵문제를 둘러싸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사태의 반전, 즉 남북정상회담의 발표는 임박한 듯 했던 대결의 긴장감에서 한시적이나마 사람들을 풀어주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국민적 환영의 바닥에는 의아심 또한 짙게 깔려 있음에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반전으로 사태진전에 관련된 불투명성이 줄어든 바가 별로 없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태도는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 성사 여부도 아직은 불투명하지만 어쨌든 남북한 정상회담은 일단 성사만 된다면 구체적 성과가 크지 않더라도 민족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결코 짧았다고 할 수 없는 반세기 분단사의 상처가 아물 수 있는 중대한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무리 미덥지 않아도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국민 모두의 심정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대가 커도 현실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남북한정부는 진정한 의도야 어떻든간에 화해를 위한 여러가지 시도를 거듭해왔지만 그 시도는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거듭된 실패는 좌절감만을 증폭시켜 왔다. 만일에 그러한 시도들이 하나씩 성공해 왔고 그 마무리를 짓는 행사로 정상회담이 발표되었다면 그야말로 환호작약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그와 정반대로 거듭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최후의 방책으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대보다는 오히려 걱정만 앞선다. 만일에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한의 화해가 달성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동안 악화된 남북관계는 남북회담에 임해온 실무관리들이 모두 최고책임자의 뜻에 어긋나게 일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되는데 설득력있는 풀이는 아니다. 특히 북한에 의한 정상회담제의가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는 시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아무리 호의적으로 해석해도 그 저의에 대한 의심을 떨치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에 정상회담이 상징적 성과도 없이 불쾌하게 끝난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이번의 정상회담이 이러한 위험성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공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역설적 기대가 인내와 대화에 입각한 관계개선책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논거인 듯 싶다.
그러나 대화에는 최소한의 조건이 따른다. 즉 여하한 종류의 무력사용이나 그 사용의 시위도 삼갈 것이라는 점에 대한 상호신뢰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뢰는 말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을 통해 장기간 축적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남북한간에는 그러한 신뢰가 없다. 불행한 일을 막기 위해서는 늦었더라도 지금부터 신뢰를 쌓아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어떠한 평화의 기대도 무의미한 것이 정치의 현실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대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몇 가지 특성 가운데 특히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 대화의 설교가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해서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아마도 북한이 그러한 설교에 귀를 계속 닫고 있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알기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대화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인지 북한의 적극적 참여자세를 유도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대국적 입장에서 양보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가끔 제기되는데 우리가 양보해야 될 현안이 과연 무엇인지 대부분의 국민들은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양보하더라도 대화를 지속시켜야 한다는 대북한 온건론 또는 유화론은 우리와 같은 다원사회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견해고 또한 강경일변도적 사고의 한계를 반추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러한 유화적 자세가 진보적인 것처럼 이(오)해되고 있는 점이다. 그동안 남북한 평화공존을 어렵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양 지역에 존재하는 비민주적 정치체제였다. 이들 독재정권들은 자신의 유지를 위한 핑계로 분단과 긴장을 필요로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화로 그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자세가 남북관계 전개에서 더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북한의 50년 독재체제의 변화 가능성과 필요성을 여전히 외면하는 북한동정론은 아직도 과거 권위주의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선의에서 해석하고 싶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의 운명과 사활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권력을 필수적 수단으로 하는 정치는 본래적으로 악마적인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정치가 품고 있는 가장 큰 비극적 역설은 선한 의도로 시작된 행동이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모든 행동의 결정이 궁극적으로는 도덕적 의도보다는 보유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정치세계의 고유논리를 외면할 때 통일도 평화도 우리와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너무나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것으로 어떤 이는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바쁘면 돌아가라」는 옛 속담처럼 남북평화의 구축은 반세기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신뢰를 쌓는 기초작업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번의 남북정상회담이 혹시라도 그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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