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삶을 추상적으로 살지는 않는다. 따지고 보면 삶을 사는 것만큼 우리에게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구체적으로 삶을 사는 것이 어디 우리뿐이랴. 동물과 새도, 나무와 풀도, 그리고 어떤 미물도 각자의 삶을 구체적으로 산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들과 달리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 우리의 삶을 의식하고 되돌아본다. 삶을 의식하고 되돌아보는 일을 우리는 「형상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형상화는 항상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할 때 그것은 철학이 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때 그것은 곧 문학이 된다. 철학에서와 달리 문학에서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 문제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시말해, 살아 숨쉬는 인간의 체취와 아픔이 소설과 희곡에 뿐만 아니라 시에도 담겨있어야 함은 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용만씨의 「화인」(「창작과 비평」여름호)은 놓칠 수 없는 시이다. 이 시는 인간의 삶이 시에서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인 것이다.
이 시에서 구체적 삶의 현장을 이루는 것은 아내와 아이의 옷, 「기름때」 베인 「나」의 「작업복」, 그리고 「나」와 「세탁기」이다. 물론 그 삶의 현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빨래하는 「나」이다. 즉 「나」는 어느날 가족의 옷은 「세탁기」에 넣어, 자신의 「작업복」은 「세탁기 아래 쭈그리고 앉아」서 「빨래를 한다」.
빨래를 하면서 「나」는 느낀다. 「웬 빨래들은 이틀 걸러 이리 쌓이는지」.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것이 어디 빨랫감이 쉽게 쌓인다는 점뿐이겠는가. 「나」의 느낌을 우리는 「아내 옷과 동해 옷/ 세탁기에 따로 넣고 /손가락만 살짝 건드려도/ 한통속 얼굴 비비며 서로 신나는데」에서도 읽을 수 있다. 전원스위치를 건드리자 세탁기 안에서 돌아가는 빨랫감을 보며 「나는」자신의 존재로 인해 「얼굴비비며 서로 신나는」 아내와 아이를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제는 무슨 이유로 자신의 「작업복」은 「따로」 빨아야 하는가에 있다. 「나」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저 기계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며, 「저 빨랫감과 함께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물론 따로 빨아야 하는 「작업복」에서 「나」는 「나」 자신을 읽는다. 「결코 양말 한 짝도/ 어울릴 수 없는/ 이것이/ 서른아홉 내 생의 진한 얼룩이라면/ 눈물이라면」, 가족과 함께 「얼굴 비비며」 마음 편하게 어울릴 여유를 갖지 못하는 「나」는 바로 이 시대의 「일하는 손」들의 고뇌와 비애를 표상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고뇌와 비애 속에서 무너지지 않는다. 「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일하는 손이 아름답다는 놈들 떠나버린/ 공장 구석에 쇠기둥으로 꼿꼿이 버티다가/ 녹슬어/ 벌건 쇠로 무너지리라」. 삶의 아픔과 아픈 삶을 살아가는 「일하는 손」의 열기가 이보다 얼마나 더 생생하게 표현될 수 있겠는가!<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교수>문학평론가·서울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