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망령이 우리 곁을 떠돌고 있다. 「일괄타결」의 장이 될 미국과의 3단계회담 개최가 확실시 되던 때 북한은 영변 5㎿급 원자로 연료봉의 일방적 교체를 강행했다. 연료봉 교체를 입회 확인하고 교체된 연료봉에 대해 시료 채취와 감마선 측정을 실시하는 것은 핵물질의 무기 전용을 막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과정중 제일 중요한 대목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대로 86년말 이 원자로를 가동하면서 장착한 연료봉 그대로 인지, 아니면 국제사회가 의심해 온 것처럼 92년 6월 임시사찰 이전에 여러차례 교체를 통해 이미 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상당량의 플루토늄을 추출했는지 당장 확인할 수가 없게 됐다. 북한 핵활동의 「과거」를 추적, 검증할 마지막 방법으로는 미신고 핵폐기물 시설 2개소를 사찰대상에 포함시키는 길만이 남았다.
그러나 북한은 작년 3월이후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막무가내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제 북한은 단순히 핵무기 개발의 가능성만을 갖고 협상카드로 이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몇개인가 핵폭탄을 만들었거나 만들 능력을 갖췄음을 국제사회에서 기정사실로 인정받는, 파키스탄 방식의 핵전략으로 전환했다는 충격적 분석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북한을 무리하게 제재해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져 김영삼대통령은 반개의 핵무기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공언했고 미국도 지난주 이미 북한 제재안을 결정, 이번주중 유엔안보리에 제출할 태세다. 중국의 태도가 변수로 남았지만 중국의 협조가 여의치 않으면 한·미·일을 중심으로 한 다국제재라도 강행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제재가 곧 선전포고라는 북한의 위협을 생각하면 전쟁의 망령은 이제 어두운 밤하늘이 아니라 백주의 거리로 나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상황은 이런데 신록의 6월, 거리와 사람들의 표정은 너무나 태평해 보인다. 다른 날도 아닌 현충일 수십만대의 행락차량이 고속도로를 메운다. 한반도의 긴장을 취재하러 급하게 날아온 외국기자들이 오히려 놀라고 있다. 안보 불감증이나 정부불신의 오랜 누적 때문이라고도 하고 성숙한 시민의식 덕분으로 돌리기도 한다. 설마 전쟁까지야 하는 희망, 그래도 인간의 이성을 믿고 싶은 신뢰감, 아니면 원천적 정보의 결핍에서 오는 무지가 뒤섞여 태평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국민들의 속마음엔 점차 불안이 커지고 있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의도가 분명해지고 있는 이제 정면 충돌을 무릅쓰고라도 이를 저지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를 추적, 핵투명성을 보장할 협상을 미국에 맡기고 북한 내부의 변화를 기다리는 인내심을 회복할 것인가. 우리 정부의 선택이 남아 있다.<생활과학부장>생활과학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