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0년은 대한민국 건설의 역사다. 정부수립 후 국기가 채 정립되기 전에 6·25동란이 일어났고 휴전 이듬해 폐허의 잿더미를 털고 만신창이가 된 나라가 간신히 기동할 때 한국일보는 그 잔연속에서 탄생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고 있을 때 한국일보도 시작했다. 그 이래 재건된 나라의 국운과 국세는 곧 한국일보의 사운이었고 사세였다. 그동안 혁명이 있었고 쿠데타가 있었다. 긴 군사독재 끝에 문민시대가 열렸다. 신문은 민주투쟁과 경제건설의 일기였다. 오늘의 정치발전과 국부는 감회 깊다. 실로 한 세기와도 같은 격세의 40년을 지나왔다. 이렇게 지금의 한국은 한국일보의 창간과 때를 같이 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한국일보 40년은 신문혁명의 역사다. 그 사이 나라의 성장만큼 우리 한국일보도 성장했다. 신문은 나라를 키우고 나라의 크기는 신문을 키웠다. 지면의 부피는 거의 햇수만큼 늘고 발행부수의 상승은 인구증가율의 수십배를 넘어섰으며 6백도의 열로 납을 녹이던 연판인쇄는 차가운 CTS로 완전히 바뀌었다.
한국일보의 탄생은 한국 언론의 「누벨 바그」(새물결)였다. 경이였고 충격이었다. 한국 언론사의 전환점이자 신기원이기도 했다. 젊은 신문으로서의 패기가 신풍을 일으켰다. 한국일보 없이 한국언론의 일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조금도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한국일보의 역사에는 지루한 페이지가 없다. 생기와 용기의 역사다. 도전과 탐신주의가 한국일보 정신이다. 창간 후 그렇게 단시일내에 정상의 반렬에 오른 투지, 본지외에 4개의 전문 일간지와 주간지로 국내 최고의 신문왕국을 세운 기상, 맨 먼저 취재망과 보급망이 해외로 뻗어 국제화를 일찍이 선도한 개척정신, 이것은 한국일보만의 것이다. 사기로 상징되는 상록의 신문 한국일보는 항상 젊은 신문의 기치를 영원히 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자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신문의 역사는 신문의 법정일 수밖에 없다.
한국일보 40년은 한국 민주화의 역사다. 민주화의 투쟁이 갓 시작되어 막 성취하기까지의 현대 정치사와 꼭 동기다. 그 투쟁동안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외쳤고 국민과 함께 최루탄에 눈물을 흘렸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신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을 다했다고 자부하기에는 부끄럽다. 신문을 국민과 이간시키려는 독재정권의 부단한 음모와 강압에 더러는 불가항력으로 독자의 눈을 가린 때가 없지 않았다. 아무리 그것이 시대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겁나와 반언론적 묵종을 겸허히 자성한다. 지금까지는 반성할 자유조차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책할 수 있는 량심이 복권하게 된 것은 상당 부분이 신문 자신의 노력때문이었다는 것도 부인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통제된 언론환경 속에서도 당시로서는 나름대로의 저항에 최선을 다했고, 필사의 안간힘을 썼다. 오늘날 이만큼 민주화가 이룩된 것은 국민들의 함성의 승리지만 재갈물린 언론의 몸부림치는 외침이 거기 섞여 있었다는 것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한국일보 40년은 언론자유 쟁취의 역사다. 태어날 때부터 지고 온 멍에의 긴 노정이었다. 그러나 언론자유를 가질 줄만 알고 그것을 쓸줄 몰라서는 안된다는데 생각이 미친다.
언론자유를 잃은 동안 신문은 독자로부터 불신당했다. 신문은 독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정도를 일탈해서 선정주의로 흘렀다. 언론자유가 확보되었다는 지금 자문해 본다. 신문은 과연 독재주의·권위주의 시대의 악습에서 탈피했는가. 그 센세이셔널리즘의 구습이 여전한 것은 아닌가. 아직도 연활자시대의 사고방식이 남아 있지는 않은가.
오늘의 신문을 비판하는 독자들의 큰 목소리를 우리는 듣고 있다. 언론이 자유를 잃었을 때 독자들은 그 비겁을 질타했으나 언론이 자유를 얻은 지금 독자들은 그 무책임과 무절제를 나무란다. 자유를 얻은 언론이 부자유스러웠던 시대보다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까지 핀잔한다. 신문의 자유는 사회의 어떤 가치에나 우선하는 것이 아니다. 일개 개인의 생명이나 명예도 존중해야 하는 가치다.
한국일보는 이런 새로운 언론불신속에서 40주년을 맞는다. 막상 획득한 언론자유가 그것을 목표로 싸우며 바쳤던 희생을 다 보상해 주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 본다. 그동안 자유가 없었으므로 다하지 못했던 사명에 이 자유를 충분히 선용하고 있는지도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일보 창간 사설의 제목은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듬해의 창간 1주년 기념사에서는 이 선언을 「신문은 누구도 사용할 수 없다」는 말로 보충설명했다. 이제 40주년을 맞으면서 우리는 이 창간정신에 「신문은 누구도 오용할 수 없다」는 한마디를 덧붙이려고 한다.
참으로 신문은 지금까지 오용되어 왔고 지금도 도처에서 오용되고 있다. 독재하에서는 언론자유의 박탈로 강제에 의해 오용되었고 지금은 언론자유의 남용으로 오용된다. 불정직한 신문으로 오용되고 있고 불정확한 신문으로 오용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아픈 심회다.
언론자유는 정직과 정확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자유없이 언론은 정도를 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언론자유의 쟁취보다 결코 쉽지 않은 언론 정도의 길에 들어섰다. 이 길을 위해 걸어온 40년의 연륜에 금을 그으며 오늘 새출발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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