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사건」후 북 보복우려… “몸조심”/탈출자 찾아와도 위해걱정… “영사관 가보라”/교민까지 “위험한곳” 벌목장안내 서로기피 북한 벌목노동자 탈출여파로 시베리아 지역은 살벌해지고 있다. 특히 하바로프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등 북한벌목장 주변의 대도시에 거주하는 기업인, 상사주재원, 성직자등 한국인들은 북한측의 납치와 테러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시베리아의 북한 벌목장을 탈출한 노동자 5명이 서울로 귀순한 이후 그들이 느끼는 북한측의 테러공포는 더욱 심각했다.
북한당국은 지난5월 18일 탈출벌목노동자 5명의 한국귀순 직후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들의 귀순을 납치행위로 규정, 즉각 되돌려 보내지 않을 경우 엄중한 후과가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때맞춰 현지 한국공관측은 현지거주 한국인들에게 신변안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줄것을 촉구했다. 북한의 「엄중한 후과」경고는 현지 한국인의 납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 상사주재원으로 나와 있는 D기업의 이성관 과장(32·가명)은 『탈출벌목노동자의 한국귀순이 잇따르면서 상대적으로 이곳에 있는 한국인 상사주재원들의 신변위험도 훨씬 높아졌다』고 긴박한 현지분위기를 전했다. 그는 『하바로프스크주재 상사주재원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한 상조회를 신변안전을 위한 상부상조단체로 바꿔야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포교활동을 하는 O교회의 Y목사도 『북한 임업당국은 매우 긴장돼 있다. 이때 몸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취재팀의 신변안전을 걱정하며 북한벌목현장 취재를 만류했다. 때가 때인만큼 촬영한 사진을 빌미로 취재행위를 간첩행위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것. 아니면 북한측의 폭행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바로프스크에는 러시아의 현 정치사회적 무질서를 반영하듯 살인 사건과 강·절도 및 폭력사건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주 일간지인 치호아케안스카야 즈베즈다(태평양의 별)에는 거의 매일 하바로프스크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이 실려 있었다. 취재팀이 블라디보스토크취재를 마치고 하바로프스크로 돌아온 19일에는 시외곽의 공항에서 시내에 이르는 대로변에 AK자동소총을 멘 군인들이 요소요소에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동행한 현지교민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가끔 있는 일』이라며 『특별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이 때문에 취재팀은 가능한 한 대낮에 그것도 무조건 차를 타고 움직여야만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는 현지교민들의 충고 때문이었다.
탈출노동자를 도와주고 있다고 소문이 난 한국인은 더욱 위험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하바로프스크의 프리아무르스카야거리에 있는 S식당 주인은 북한의 탈출노동자가 화제에 오르면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스스로 화를 자초할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취재팀의 종용에 마지 못해 입을 열었지만 『이름이 신문에 자꾸 오르내리면 테러의 표적이 된다』며 신분은폐와 사진촬영불가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취재팀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그가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를 공감할 수 있었다. 그는 올해초 한달 동안에 무려 세차례나 외부침입자를 경험했다.
침입자가 돈을 노린 러시아인 강도인지 강도를 위장한 북한측의 테러위협인지 알 수 없지만 묘하게도 그가 자신을 찾아온 탈출노동자를 도와주고 있다는 소문이 교민사회에 나돌면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는 『테러위협일 가능성이 50%』라며 『벌목장 탈출노동자가 손님을 가장해 도와달라고 찾아오거나 전화를 걸어오더라도 무조건 블라디보스토크의 총영사관으로 가보라며 더 이상 대꾸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내가 살 수 있는 길이다』라고 설명했다.
러시아국적을 가진 현지교민들도 겉으로는 태연해하면서도 은연중에 불안감을 드러내곤 했다. 대표적인 경우가 취재팀의 벌목장 안내기피. 일부 현지 교민은 독일의 슈피겔 취재팀이 체그도민의 제1연합주변에서 당한 폭행사건을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며 「위험한 곳」이라고 동행을 거절했다.
현지 총영사관 사람들은 아예 취재팀에게 벌목현장에 접근하지 말도록 여러차례 당부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그동안 탈출노동자를 헌신적으로 돌보아주던 한국인들의 정열도 식어버렸다. 오로지 믿음으로 그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입을 연 한 성직자는 『시시각각으로 체포위험에 시달리는 그들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북한측이 탈출노동자를 위장해 탈출노동자 지원에 적극적인 일부상사주재원이나 교민들에게 접근,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정보도 있어 탈출노동자들에게 무관심한 한국인만을 탓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도 이제 탈출노동자를 보호하고 한국이나 제3국으로의 탈출을 도와주는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고 실토했다. 일단 하바로프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등 대도시는 인구가 많고 지역도 광활해 숨어지내기는 편하지만 그들이 언제까지나 숨어다닐 수만은 없는게 분명했다. 러시아측으로부터 합법적인 체류허가를 받지 못하면 항로나 육로, 해상로를 통해 제3국으로 탈출,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하지만 취재팀의 경험에 의하면 탈출자들이 항로나 해상로를 통해 탈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공항이나 부두에는 북한 안전요원들이 24시간 감시하고 있고 설사 이들의 추적을 따돌린다고 해도 여권없이는 러시아의 출입국검열대를 통과할 수가 없다.
Y목사는 북한노동자의 해외탈출의 어려움을 더욱 구체적으로 전해주었다. 그는 『지난번 김길송씨의 화물선 밀항사건 이후 밀항도 불가능해졌다. 일전에 한국방송을 통해 밀항성공소식을 전해들은 탈출자 한 사람이 자신의 밀항을 도와달라고 요청해와 하바로프스크에서 어렵게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동행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항구를 중심으로 암약하는 마피아를 동원하는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통해 그를 부산행 러시아선박에 태우려고 했지만 도저히 불가능해 하바로프스크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탈출자들은 중국의 보따리장사꾼에게 20만루블(약8만원)을 주고 증명서를 사 연변으로 탈출을 기도하지만 중국어를 전혀 못해 중국국경에서 거의 차단당한다고 한다. 그럴 경우 당사자는 중국보안당국에 의해 북한측에 넘겨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 단 한번의 기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모험을 해야 한다.
하바로프스크에는 이러한 탈출노동자의 약점을 악용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한 교민은 『여기에는 탈출자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탈출자들의 형편을 악용,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마마(러시아말로 어머니, 여기서는 대모)조직이 있다. 대개 마피아의 보호를 받는 마마조직은 탈출자들을 일정한 곳에 숙식시키면서 안전을 책임지는 대신 아파트공사장이나 탄광, 농장등에 데려가 일을 시키고는 임금의 일부를 챙긴다』고 말했다.
현지한국인들은 또 러시아 마피아단의 살해위협에도 시달리고 있었다. 취재팀은 현지상사주재원이나 교민들로부터 마피아에게 당했던 사례를 많이 들을 수있었다. 그들은 취재팀에게도 항상 현지교민과 같은 옷차림을 할 것, 밤거리를 나다니지 말것, 지갑을 함부로 꺼내지 말것, 외국관광객 냄새를 풍기지 말 것, 중국에서 온 교포장사꾼 행세를 하지 말 것등 한국교민사회에 적용되는 5가지 행동수칙을 전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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