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주민들,도둑취급 박대 시베리아 북한 벌목노동자들은 5월이 시작되면 극심한 보릿고개에 시달린다. 이들은 이때부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주변의 러시아 마을로 내려가 밥을 구걸하거나 밀렵, 낚시, 약초캐기, 심지어는 상점이나 민가에서 빵이나 소시지등을 훔치기도 한다.
취재팀이 잠입한 지난 24일 하오 엘가의 제2사업소 산지중대 벌목현장에는 주변을 정리하고 지키는 인원만이 남아있었다. 처음 만난 벌목노동자 두사람에게 『모두 어디 갔느냐』고 물었더니 『책임자와 함께 엘가마을로 갔다』는 대답이었다. 『지금 엘가의 가게를 돌아보고 있거나 체쿤다의 우리야 강변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간단한 설명이 뒤따랐다.
그렇다고 마을로 내려간 노동자들이 한가로이 낚시나 쇼핑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아침 일찍부터 「먹는 문제」를 해결하러 내려가는 것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그같은 정황이 뒷받침됐다. 그들은 점심을 먹었냐는 물음에 머뭇거리기만 했다. 비상식량으로 준비해온 러시아제 검은 빵과 오이를 건네주자 처음에는 머뭇머뭇하더니 금세 먹어치웠다. 그들은 점심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한게 분명했다.
취재팀을 안내한 러시아인 미하일(가명)은 『5월로 접어들면 벌목노동자들의 생활이 1백80도로 바뀐다』고 귀띔했다. 그는 『벌목현장에 대한 식량배급이 겨울 작업철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어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엘가나 체쿤다의 러시아인 마을로 몰려와 품을 팔거나 캐온 약초를 빵이나 고기로 바꿔간다』고 전했다.
북한 노동자들은 든든히 먹여주기만 하면 일당 4천루블(약 1천6백원)에도 마을 사람들의 텃밭을 갈고 감자를 심어주거나 집안수리, 장작패기, 변소치기등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품삯은 하바로프스크시내에서 택시를 한번 타는데 드는 택시비 5천루블에도 못미치는 것이다. 그래도 저마다 서로 하겠다며 싸울 정도이다.
취재팀은 제2사업소 주변마을인 체쿤다에서도 벌목노동자의 굶주린 단면을 확인했다. 체쿤다에서 만난 러시아인 주부 레나(가명 45세)는 『2∼3년 전만해도 주민들이 구걸나온 북한인들에게 빵이나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주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내 전반적인 형편이 어려워지고 그들이 개나 돼지, 닭등을 훔쳐가는 바람에 마을주민들이 회의를 열어 일절 도와주지 않기로 했다』고 전했다.
벌목장 주변마을의 러시아사람들이 북한 벌목노등자들의 접근을 꺼리자 그들은 더욱 훔치는 일이 잦아졌고, 이렇게 되자 러시아사람들은 벌목노동자들을 도둑취급하게 됐다. 취재팀이 체쿤다에 들어갔던 지난23일 어이없는 일을 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는 안내인과 차량을 구하기 위해 은밀히 마을을 돌아다녔는데 집집마다 문을 열어줄 생각도 않고 집안에 숨어 우리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들은 취재팀을 아침부터 뭔가를 훔치러 온 벌목노동자로 생각한 것이다.<2면에 계속>
◎빵통마다 자물쇠… 식구끼리도 도난 경계/고된작업에 지루한 사상교육… 쉴틈 없어/한국소식 들으려는듯 단파방송에 큰관심
<1면서 계속> 체쿤다에 하나밖에 없는 상점도 북한인들이 몰려오면 비상이 걸린다. 떼로 몰려와서 물건을 고르는 척하다 소시지같은 것을 슬쩍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기 때문이다. 지난 가을에는 참다못한 체쿤다주민들이 엘가의 제2사업소 본부를 찾아가 강력히 항의하고 하바로프스크 주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또 고기를 구하기 위해 무절제한 밀렵을 계속하자 주정부는 최근 삼림보호 및 밀렵단속인을 지정, 단속에 나섰다.
벌목현장에 있는 간이숙소 빵통사이에도 먹을 것과 물품등을 둘러싸고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취재팀이 잠입한 2사업소 벌목현장에 있는 5개의 빵통가운데 3개는 당시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빵통주변에는 기본적으로 벌목노동자 외에 다른 사람이 있을리 없다. 그런데도 자물쇠로 채운 이유를 묻자 외부사람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른 빵통식구들의 손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노동자들은 왜 이 시기에 벌목작업에 전념하지 않고 배를 채우거나 약초캐기등 그밖의 일에 「한가하게」매달리는 걸까. 북한은 시베리아에서 벌목의 최적기를 겨울철로 잡고있다. 벌목작업이 한창인 겨울철에는 그나마 식량배급 사정이 다른 계절에 비해 좀 더 나은 편이다.
북한 임업대표부가 시베리아에서 여름철보다 겨울철의 벌목작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특별하다. 겨울철이 돼야 나무의 물기가 빠져 삼림의 수질이 좋고 땅이 꽁꽁 얼어 운반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질과 운반이 편리하다면 작업의 어려움과 추위를 아랑곳 할 이유가 없다. 여름철에는 자연조건이 좋은 극히 일부에서만 벌목작업을 한다. 현장에서 확인한바에 의하면 목재 운반도로도 겨울철용과 여름철용등 두가지가 있었는데 여름철용이 더 넓게 잘 다듬어져 있다.
한 탈출벌목노동자는 『5월이 되면 먹을 것뿐만아니라 작업복, 장갑, 양말등 물품을 훔치다 들켜 동료들간에 싸움이 벌어지곤한다』고 설명했다. 미하일은 『올해들어 가장 추운날로 기억되는데 주변의 한 산지중대에서 빵통식구들끼리 패싸움을 벌여 몇명이 엘가로 끌려오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
5월들어 동료들끼리 주먹다짐이 특히 잦은 것은 일부노동자들의 철수시기가 보릿고개와 겹쳐있기 때문이다. 귀국할 사람과 남는 사람이 서로 한가지 물건이라도 더 챙기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다.
벌목노동자들은 식량과 물건챙기기에 전념할 수만은 없다. 지루한 사상교육도 받아야 한다. 한 벌목노동자는 작업의 안전교육 실시여부를 묻는 질문에 『안전교육은 필요없다. 우리는 김일성수령과 당, 그리고 조국의 발전을 위해 이곳에 왔다는 정신교육으로 족하다』면서 일주일에 여러차례 사상교육을 받고있음을 시인했다.
빵통하나에 6명씩 모두 30명의 산지중대원들은 개인적으로 일과후 밤과 휴식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이런 의문은 엘가에서 전자제품을 파는 러시아인의 말에서 해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같았다. 그는 북한사람들이 어쩌다 한번씩 러시아제 녹음기를 들고와 단파방송을 들을 수 없겠느냐고 문의한다고 밝혔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말은 그들이 단파방송을 통해 날아오는 한국소식을 듣고 싶어한다는 강한 뉘앙스를 풍겼다. 수용소군도와 같은 그들의 비참한 생활을 접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이진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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