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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부상…강택민 2인자로/권력구조 변화(천안문사태 5주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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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부상…강택민 2인자로/권력구조 변화(천안문사태 5주년:상)

입력
1994.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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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지원업고 당정군 모두 장악/경제부문 개혁파 주용기 “우뚝”/“진압반대” 조자양·“무력진압” 양상곤 뒷전으로 북경 천안문사태가 발발한지 오는 4일로 5주년이 된다. 천안문사태에 대한 중국내의 평가는 아직도 구구하다. 현 지도부는 당시의 유혈진압에 대해 체제전복의 「폭거」를 진압하기 위한 정당한 조치였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고 반체제인사들은 평화적인 민주화운동에 대한 잔혹한 탄압이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로 넘겨지지 않은채 여전히 「현재」의 문제로 남아 있는 천안문사태이후 5년간 중국의 변화를 3회에 걸쳐 소개한다.【편집자주】

 5년전이나 지금이나 중국의 권력구조는 등소평을 최고 실권자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 제도와 법을 초월한 이 「영향력의 정치」는 오히려 5년전보다 더 강화된 느낌이다. 89년 당시 등은 당과 국가의 군사위주석으로 당의 우두머리인 조자양을 제1부주석으로, 국가기구의 우두머리인 양상곤 국가주석을 상무부주석으로 밑에 거느리고 있었다. 「권력은 총구로부터 나온다」는 모택동의 논리에 따른다면 등이 당시 무력진압을 명령한 것은 최고 결정권자로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모든 공직에서 은퇴, 공산당의 평당원인 등은 아무런 직위도 없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모의 지위가 반석에 올랐듯이 천안문사태는 등을 태상황적 지위로 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등의 영향력을 제외하면 지난 5년동안 중국의 권력구조는 「권력의 제도화」와 「최고 권력의 집중화」라는 측면에서 크게 변했다. 

 천안문사태 당시의 지도부의 분열에 대한 반성과 후계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는 등 자신의 노력 및 동구, 구소련등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한 위기감이 합쳐져 전개된 이같은 권력구조의 개혁작업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탈제도적 측면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천안문사태 당시 학생시위에 대처하는 방법론을 둘러싼 지도부의 분열상은 당시의 중국권력구조의 취약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당 총서기인 조자양과 이붕총리, 양상곤 국가주석간에 벌어졌던 대립상황은 원로들과 등의 개입이 있기전까지 수습되지 못했다. 

 결국 이 과정에서 조가 실각돼 당우위의 원칙과 당의 권위가 크게 훼손됐으며 또 중국권력구조의 2원체제의 모순 역시 그대로 폭로됐다.

 조의 실각에 따라 등은 89년11월과 90년3월 당과 국가의 군사위주석직을 모두 89년6월24일 총서기에 선출된 강택민에게 물려주고 93년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강을 국가주석에 올리는등 당정군의 최고 직위를 모두 몰아주었다. 

 등이 강택민 한 사람에게로 권력을 집중시킨 것은 자신의 사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경우 결국은 국가가 분열로 치달을 것이라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또한 중국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정치국상무위원회 위원인 교석과 이서환이 각각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정치협상회의 주석을 겸임하는등의 당정 일체화 개혁이 14차 당대회를 통해 단행된 것도 중국공산당의 집권당으로서의 위치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 5년간 정치적으로 급성장한 인물은 역시 강택민주석이다. 당시 상해시서기로 정치국원을 겸하고 있던 그가 단번에 2단계를 뛰어 넘어 총서기로 선출되고 또 당정군의 최고 직위를 거머쥔 것은 바로 천안문사태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한명의 「정치적 신데렐라」는 주용기 부총리. 89년 당시 상해시부서기 겸 시장으로 있던 개혁파인 그는 91년 일약 부총리로 발탁되어 당시만 해도 보수파가 우세한 중앙정치무대로 진입했으며 93년7월2일에는 중국의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장을 겸직, 「경제차르」의 위치에 올라섬으로써 개혁파의 최종 승리를 과시했다.

 이와 같은 「상해파」의 부상은 천안문사태 당시 진압을 반대했던 조자양과 진압에 물리력을 동원하는데 결정적 공헌을 한 양상곤이 차례차례로 모두 권력의 전면에서 밀려났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정치적 태풍을 비켜서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다.【북경=유동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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