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은 집권 이래 추진해온 소위 4강정상외교를 마무리 짓는 마지막 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김대통령은 작년 11월 미국을 먼저 다녀왔고 금년 3월에는 일본과 중국을 차례로 순방한바 있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안보상 가장 중요한 4대 강국이다. 그래서 우리 외교에서는 최우선 순위로 자리 매김이 될 수밖에 없다. 이들 나라에 대한 4각외교를 마무리한 뒤에는 유럽이나 동남아등지로 정상외교의 발길을 넓히는 순서로 나가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이 1일부터 방문하는 러시아는 지금 정치적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새로운 민주질서를 세우기 위한 진통이 거듭되고 있으며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온갖 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격동기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해서 그 잠재력마저 경시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러시아다. 러시아는 여전히 군사대국으로서 첨단과학과 기초과학분야에서 앞서가는 나라이고 정신적 문화적인 면에서도 실력이 세계적 수준이다. 이러한 실체를 파악하면서 우리는 러시아에 어떻게 접근해서 어떤 관계를 모색해야 할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목전의 이익에 급급한 나머지 단기적인 안목에서 생각할 것인지 아니면 장래를 내다보고 「큰 외교」를 할 것인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지난 90년 국교회복을 전후해서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대러시아외교는 일관성을 잃고 굴곡이 심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특히 경협차관 30억달러를 둘러싸고 「그렇게 많이 줄 필요가 있었느냐」「상환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며 국내에서 옥신각신했다. 이러한 논란의 파장은 양국 관계에도 어김없이 반영되어 때로는 노골적인 외교불화로 나타나기도 했었다. 한국은 하루라도 빨리 받아내야겠고 러시아는 갚을 능력이 모자랐기에 양국간에는 가장 큰 현안이 되어왔었다.
경협차관외에도 대한항공기격추사건 배상, 시베리아 북한 벌목공처리, 구러시아공관부지등이 양국간의 현안문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이번 러시아 방문은 당장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실무차원에서는 논의하겠지만 옐친 대통령을 만나 「빚 받으러 왔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서방채권국과 보조를 맞춰 상환유예의 호의를 베푸는 것도 동반자의 우호관계를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려울때 도와준다는 자세로 임하면 러시아도 두고두고 고마움을 간직할 것이다. 그런 호의를 바탕으로 서로가 접근한다면 다른 현안문제들도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