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향숙씨의 소설 「문을 열어주며」(동서문학·여름호)는 그 제목이 비유적으로 암시하듯 「마음의 열림」이라는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작가가 그 열림의 가능성의 관건을 말과 몸의 문제로 집약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닫힌 현실 속에서 마음은 어떻게 열리는가? 이 작품이 던지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작품 스스로의 답은 몸과 하나된 말을 통해서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 설정되어 있는 상황은 두 주요 등장인물인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아들이자 남편인 인물(승우)을 며느리(명애)의 운전 과실로 잃은 이후 고부간의 긴장된 상황이다. 외아들이 며느리 탓에 죽었다는 사실에서 시어머니가 품음직한 원망, 며느리의 입장에서 지니지 않을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은 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싸늘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은 자칫 그 자체가 칼이 된다. 그러나 또한 그 칼날이 바깥을 향하지 못하고 안으로 저며들어오는 것일 때 그것은 마음을 썩게 만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먼저 말의 칼을 꺼내 휘두르는 사람은 며느리다. 그녀는 감히 재혼을 하고 싶다는 말을 꺼냄으로써, 이제껏 며느리에 대한 원망의 말을 안으로만 삭여왔던 시어머니의 가슴에 독이 퍼지도록 만든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마음의 독을 칼로 벼려 그것으로 며느리의 가슴을 찌르지는 않는다. 이 섬뜩하도록 예리한 대결의 장에도 그러나 화해의 순간은 찾아온다. 손자 영진이가 심한 고열로 앓을 때 혈육으로서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하게 되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러고 보면 애당초 승우와 명애의 결혼도 명애가 몸으로 당하는 고통이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승우는 명애가 자신에 대한 모멸감에서 휘둘렀던 말의 칼을 자신의 마음속의 독으로만 간직하다가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해 죽게된 것으로 이해된다. 죽음의 실제 이유와는 상관없이 이것을 말과 몸의 축으로 이루어지는 이 작품의 상징적 의미의 구조 속에서 해석할 때 그의 죽음은 이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반면에 시어머니와 명애와의 이해와 포용은 칼로서의 말을 사랑으로서의 말로 감싸안을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의 시작은 우선 보거나 스치거나 하는 등의 몸에 바탕을 둔 감각적 접촉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말은 그 다음에 온다. 진정 몸으로부터 나오는 말만이 참된 사랑의 말이 된다. 이러한 말들로 순화될 때 우리의 현실도 보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다. 현실은 어떠한가? 사람들의 치를 떨게 만들었던 패륜의 사건도 「호적을 파가라」라는 말의 칼에 칼로 보복한 것은 아니겠는가?<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불어교육과교수>문학평론가·한국교원대 불어교육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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