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반대파 움직임싸고 해석분분/지원잇달아 “아직은 신뢰” 우세 지난 2월 9일 등소평의 수척한 모습이 공개된 이후 「포스트 등」을 둘러싸고 무수한 소문과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 갖가지 소문은 두가지 형태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등소평에 의해 89년 6월 후계자로 지명된 강택민총서기의 위치가 불안하다는데 초점이 맞춰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등소평의 사후 강택민총서기의 잠재적 라이벌의 동향을 둘러싼 것이다.
전자는 주로 강택민총서기가 후계자의 위치를 확보한데는 등소평의 신임이 절대적이었던 만큼 등소평의 사망, 혹은 등소평의 신임철회가 강택민의 입지를 단번에 무너뜨릴 것이라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최근에 보도된 등소평이 강택민을 질책했다는 것도 이러한 강택민의 불안정한 입지와 관련한 일면으로 볼 수 있다. 후자는 조자양전총서기와 양상곤전국가주석이 최근 비밀리에 광동성 남해시 서초산에서 회동했다는 보도등이다. 89년 6·4 천안문사태당시 서로 등을 돌렸던 이 두 정치 거물은 정치 성향은 판이하나 등소평에 의해 현재 정치전면에서 밀려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등소평의 사후에 가장 강력하게 강택민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꼽혀왔다. 이밖에도 등소평의 지시가 현 지도부에 잘 먹혀들지 않아 등소평의 지시를 전달하는 등소평판공실과 강택민을 중심으로 하는 현지도부와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든가, 조자양이 지난해 하얼빈시부근에서 하계휴양시 국가원수급으로 접대하라는 지시가 중앙으로부터 나온것으로 보아 조자양의 복권이 임박한 것이 아니냐는 보도도 있었다.
「태상황」의 레임덕 현상을 전하는 소문이 무성해진 계기는 지난 2월 공개된 수척해진 등소평의 모습이다. 등소평의 건강과 관련해서는 최근 홍콩을 방문한 등소평의 동생과 등소평의 장남인 등박방이 직접 나서 부인했다. 물론 이들의 부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일부 보도처럼 등소평이 침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며 영향력을 급속도로 잃어 가는 상황이 아닌 것만큼은 확인할 수 있다. 92년초의 남순강화이후 중국관측통들 사이에서는 고속성장론=등소평 및 개혁파, 긴축정책론=보수파 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등소평이 자신의 입장을 탄력적으로 바꾸는 실용주의적 정치가라는 점이다.
다만 고속성장정책추진으로 이득을 보아온 「태자당」그룹 및 지역 지도자들과 강택민 이붕 주용기등의 중앙지도자들간에 어느 것이 진정한 등소평의 뜻이냐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다. 강택민의 입지불안과 관련한 소문도 바로 이들의 흑색선전일 가능성도 있다.
등소평과 강택민간의 관계가 동요하고 있는 구체적 증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올해 들어와 등소평이 강택민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는 증거만이 나올 뿐이다. 2월 9일 관영언론을 통해 「신원로」로 만리를 부상시킨것은 만리가 양상곤―양백수의 「양가군」을 견제할만한 군배경을 갖추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등이 자신의 사후를 대비한 포석으로 분석된다. 또한 지난 12일 폐막된 제8기 전인대상무위원회 제7차회의에서 인민해방군의 문민통제원칙을 법제화한 조례를 통과시킨 것도 민간인 출신인 강택민의 군통제를 염두에 둔 제도적 개혁조치로 보아야 한다. 강택민 역시 등소평의 뜻을 저버리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지난 12일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를 만났을 당시 강택민은 89년 6·4사태의 처리가 정당했음을 강조했다.
최고실권자인 등소평과 그가 세번째로 택한 후계자인 강택민과의 관계는 여전히 튼튼하다.【북경=유동희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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