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은 역사를 생각하게 하는 도시다. 그것도 종교, 예술, 상업의 역사가 아니라 권력의 흥망과 성쇠,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도시다. 무거운 전통에 짓눌려 있는 사적들, 힘의 시위를 위해 세워 놓은 거대한, 사람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건물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추적과 정복을 위해 만들어 놓은 무대와도 같은 평야의 도시, 북경…. 필자는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지난 11일 중국 국무원소속 국제문제연구중심이 주최하는 아·태지역안보문제 「연토회」에 참가하기 위해 북경을 다시 찾았다. 역사의 무거운 유산은 연토회의 출발순간부터 참가자들의 의식을 누르고 있었다. 주최측은 전기침외교부장의 기조연설에 앞서 외국인 참가자들과 30분간 환담하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마침 같은 시기에 키신저, 이광요등이 북경에 와 있었다는 지적에 전기침외교부장은 유창한 영어로 『모두 북경에 온다(EVERYBODY COMES HERE)』라고 응답했다. 물론 별다른 저의없는 코멘트였다고 본다. 그러나 한 동남아참가자는 필자에게 귓속말로 『무의식중에 중화사상이 튀어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연토회는 냉전후 아태지역의 안보상황과 미래전망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토론을 했다. 동북아, 동남아, 그리고 특히 미중일의 역할등에 대해 세력균형, 경제협력, 군사전략등의 측면에서 의견교환을 했다. 토론의 주제는 많았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토론의 밑에 깔려 있는 일종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F)는 중국에 관한 것이었다. 중국은 지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지만 앞으로 초강대국이 된 중국은 이 지역의 안보에 도움이 될 것인가 아니면 위협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 참가자 모두의 관심거리였다. 중국측 참가자들은 우선 중국의 성장에 대해 서방측이 과장하고 있다고 불평하면서 21세기초에 중국경제가 미국경제규모보다 커진다는 것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중국은 과거와 현재도 헤게모니를 추구한 일이 없지만 앞으로도 결코 헤게모니를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그렇다면 왜 중국인민군은 민간정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19세기 프러시아군, 1920·30년대 일본군같이 집권당의 지도부에 보고하게 되어 있는가? 영토권문제에 대한 강압적인 자세, 군의 현대화계획등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중국은 군사정보교환을 포함한 신뢰구축조치(CBM)에 참여할 용의가 있는가? 그 밖에도 중국을 향한 비판과 의혹의 화살은 많았다.
드디어 중국측에서는 지난 역사의 깊은 상처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독백같은 응답이 터져 나왔다. 중국은 패권을 행사한 적은 없어도 패권의 제물이 된 적은 있었으며 제국주의정책을 편 일은 없어도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을 당한 경험은 있다고 했다. 아편전쟁에서 잊을 수 없는 민족적 치욕을 당한 이후 중국은 지난 1백50년동안 서방세력과 일본으로부터 갖은 모욕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안정을 찾게 되어 빈곤을 탈피하기 위한 경제발전의 길에 막 들어섰는데 미국은 소련이 무너지자마자 중국이 더 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소위 「인권」이라는 것을 들고나와 중국을 내부적으로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고 중국대표들은 거의 떨리는 목소리로 미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털어놓았다.
사실 「소련의 위협」이 있는한 미중관계의 대결적 측면은 의도적으로 축소되었었다. 그러나 냉전이 종식된 지금 대륙세력인 중국과 해양세력인 미국은 한반도, 대만, 티베트, 인도차이나등에서 영향력 경쟁을 피하기 어려운 지정학적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미국과 중국의 역사적 경험은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중국은 최근 16년을 제외하고는 지난 1백50년동안 계속되는 외침과 내란속에서 쇠망과 치욕의 고난을 겪어왔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이 무엇보다도 국내 안정을 유지하고 외부세력을 물리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반면 미국은 남북전쟁이후 자국영토안에서 내란도 외침도 없었다. 미국사람들이 사회의 안정보다 개인의 자유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나온다. 국제질서의 관점에서 미국은 현상유지세력이라면 중국은 새로운 강대국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현상타파세력으로 된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불가피하다.
이번 연토회에서 북한의 붕괴가능성이 논의되었는데 미중의 입장에 거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중국참가자들은 북한의 몰락가능성을 축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특히 만일 북의 체제가 붕괴되는 경우 외부세력이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역시 그러한 전망을 환영할 수는 없는 입장의 뉘앙스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경에서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상황이 많이 달라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중국 주최측에서는 이번 회의에 북한측을 초청했으나 북한은 마지막 단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불참했다고 밝혔다.
어떤 중국참가자는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북한이 붕괴되고 남한이 북을 흡수통일하는 경우 통일된 한국이 지금보다 미국을 덜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런 시나리오는 중국의 이익에 부합된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하나의 가상적 논리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첫째는 한국전쟁이 끝난 40년후에도 한반도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경쟁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한반도의 통일은 주변강대국들 중에서도 미국과 중국의 이익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끝으로 이 문제는 미국과 중국사이에 해결하도록 맡겨 두기에는 오늘의 미중관계가 너무 긴장돼 있으며, 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인식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다. 결국 우리가 문제해결의 길을 찾아야 하고 중국과 미국의 입장이 조화될 수 있는 미래를 창조해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의 장래를 보장하는 길이다.
<사회과학원장>사회과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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