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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급증… 북송동포가 주표적(“배고파서 왔디요”:5·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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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급증… 북송동포가 주표적(“배고파서 왔디요”:5·끝)

입력
1994.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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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부장에게 부탁 일약 소위로 특진/딱한사람 봐준후 술사례 받고 옷벗어/“북체제와 함께 나도 점차 파멸로” 깨달아/91년 탈출 결심… 이제 모든것이 새로 시작 『서울이 잘 산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잘 사는지는 몰랐어요』

 처는 서울에 온 이후 자주 이런 소릴 한다. 이곳은 먹는 문제를 따져보는 것부터가 유치할 뿐이다. 입는 옷, 사는 집, 거리 풍경등 모든 것이 고향 함흥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고 수십번 가 본 평양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에게 북의 실상을 아무리 얘기해 봐야 1백% 믿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월급도 두배로 올라

 『고향서 그대로 살 수도 있었던 게 아닌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해본다. 그렇다. 나도 북한에서 한때는 「나노라」(내로라)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때 옷만 벗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고향에서 그런대로 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문득 내가 별을 달고 위세를 떨치던 사회안전부 시절이 떠오른다.

 『려보, 기뻐하기요. 나 오늘 별 달았시요』 75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만삭의 처는 기뻐서 어쩔줄을 몰랐다. 73년 제대와 동시에 결혼을 했고 그해 6월 사회안전부 특무상사로 제17호공장(함흥의 화약공장) 안전부장 운전사로 취직한 이후 근 1년반만에 드디어 안전부 경비소대장(소위)이 된 것이다. 곧 이어 금주가 태어나 경사가 겹쳤다. 월급도 한달에 62원에서 1백20원으로 배 가까이 올랐고 안전원과 보위원에게는 무상으로 공급되는 옷도 면옷에서 모직옷으로 바뀌었다. 저금소(은행)에 저금도 할 수 있었다. 쌀과 고기는 두 식구에게 오히려 남아돌 정도였다. 안전부 소위라 어디든지 무사통과였기 때문에 수시로 수산사업소에 달려가 처가 좋아하는 싱싱한 어류와 해산물도 구할 수 있었다. 

 『이곳은 정말 인민의 낙원이구만. 위대한 수령께 감사해야지!』 적어도 그때까지는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특히 6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을 비롯한 동부독일, 웽그리아(헝가리), 로므니아(루마니아) 등 동구권으로부터 무상원조를 많이 받아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보다 앞선 최절정기였다. 

○연탄사고 거의 매일

 별을 저절로 단 것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안전부장 운전사였기 때문에 매일 충성을 보여줄 수 있는 행운을 안고 있었고 어느 날 은밀한 부탁을 할 수 있었다. 『부장동지, 나도 별 좀 달아주시오』 부장은 그동안 충직했던 부하의 간곡한 부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안전부장의 한 마디로 나는 별을 단 것이다. 그후 중위나 대위로 진급할 때도 적당한 부탁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일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안전부 정치대학을 졸업한 뒤 대위계급장을 달고 함흥시 회상구역 안전부의 호안과 지도원으로 일할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공장·기업소 안전부 4개, 분주소(파출소) 4개에 지도원 7명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다. 한번은 함흥시의 어느 다리 밑에서 벌써 수년째 비슷한 수법의 강간사건이 계속되는데도 범인이 잡히지 않은 때가 있었다. 북한에서는 젊은이들의 성도덕에 대해 의외로 관대한 반면 여관에는 절대 남녀가 함께 투숙할 수 없게 돼 있어 주로 야산이나 다리 아래서 성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다른 안전원들은 이 사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동일범이라는 확신으로 부하들과 함께 1주일 넘게 잠복한 끝에 2명의 연쇄강간범을 잡을 수 있었다.

 겨울이면 거의 매일 구멍탄(연탄) 사고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었고 그외에는 강도나 도둑사건이 가장 많았다. 강도나 도둑사건도 70년대 이전에는 그저 1주일에 1∼2건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이후 북한경제가 몰락의 길로 접어들면서 하루에도 5∼6건씩으로 잦아졌다. 대상은 주로 일본에서 온 「귀국자」(북송 재일동포)들이었다. 함흥시만 하더라도 평균 5가구당 1가구가 귀국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일정한 송금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범죄인들의 좋은 표적이었다. 내가 탈출하기 직전인 올해 초부터 이들의 친척방문을 위한 방일은 물론 송금마저 차단된 상태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여전히 돈이 많은 부류에 속한다.

○뇌물로 통하는 사회

 나는 술 두 상자 때문에 별이 날아가고 사회안전원 제복을 벗게 됐다. 87년 5∼6월께였다. 그때 3건의 교통사고사건 가해자들을 모두 석방한 적이 있다. 이중 1명은 사람을 치는 사고를 범했지만 늙은 부모와 처자식등 7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데다 사고 자체도 자동차의 배터리가 약해 전조등이 제 구실을 전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이와 비슷한 정상을 참작해 석방했었는데 이들이 귀한 평양술과 개성인삼술을 한 상자씩 사례조로 들고 왔기에 이를 접수하는 바람에 목이 날아간 것이다.

 물론 뇌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북에서는 뇌물이 없는 곳이 없고 안 통하는 것이 또한 없는 게 사실 아닌가. 안전부는 물론 검찰소, 재판소 등 모든 곳에서 부정이 이루어지고 있다. 법에는 2백만원(한국돈 7억6천여만원) 이상의 국가재산을 유용하면 총살(대부분 공개처형)하도록 돼 있지만 이같은 죽을 죄를 지고도 멀쩡히 살아남은 자들이 부지기수다.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만 억울하게 처벌당한다. 얻어내기가 까다로운 평양거주권도 뇌물만 먹이면 따낼 수 있다. 한 마디로 법이 필요없는 사회다.

 제복을 벗은 뒤 채취기계공업총국 함흥지구 수입자재공급소의 운전사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유류난 때문에 차가 있어도 굴릴 수가 없는 상황이 계속됐는데 간부들은 『비서동무, 기름은 알아서 얻어오라우』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손톱 곪는 건 알아도 염통 곪는 건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지금 북한의 상황을 일컫는 말이리라.

○약 암시장가야 구입

 내가 별을 달았다고 멋모르고 좋아하고 있을 때쯤부터 북한은 이미 내부적으로 썩을대로 썩었고 경제는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고립의 길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 같다. 금주에 이어 금룡이·은룡이가 2년 터울로 차례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만큼 힘이 들기도 했겠지만 해가 바뀔수록 배급량이 줄어들고 생필품이 달렸다. 모든 의료혜택이 무상이라지만 아파서 병원에 가더라도 약이 없어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약은 오히려 암시장에 가야 살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군비증강은 여전했다. 전쟁비축미니 애국미니 하는 것들은 계속 축적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는 군도 사정이 비슷해졌다. 식량이나 각종 보급품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영양실조자가 늘어나고 군기가 엉망이라고 들었다. 비행기나 함정이 늘어나고 신형미사일을 자체개발했다는 얘기도 자주 들렸다. 이러니 『차라리 전쟁으로 끝장내자』는 말이 안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내가 살던 함흥시 주민들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미제나 남조선이 쳐들어 오면 우리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나 요즘은 『누가 이기든 빨리 전쟁이라도 나서 끝장이 나면 지금보다는 나을 것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별을 떼인 후 평범한 인민들 속으로 돌아오고 나서부터 내 인생과 우리 가족들 생활도 북한체제와 함께 파멸로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수령과 지도자, 선전매체들은 여전히 「흰 쌀밥과 고기」 「인민의 낙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과거 인민들을 굶기지 않을 때는 대외에 거짓말을 했고 지금처럼 굶길 때는 자국민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내가 북한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혼자 마음속으로 탈출을 결심했던 91년에도 그랬고 탈출 전날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남은 건 사느냐 죽느냐 하는 선택 뿐이었다. 3월 13일밤 금룡이 금주를 먼저 혜산으로 보내면서 가족들을 모아놓고 「교양」을 시킬 때 강조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성공하면 행복이고 실패하면 죽음이다』

 그런데 이제 나는 성공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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