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어디 하나 둘일까. 그러나 손자나 손녀의 재롱을 바라보는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눈길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정현종씨의 「까치야 고맙다」(「현대문학」 4월호)가 소중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어린이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길만큼이나 아름다운 눈길이 또 하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니, 까치를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이 그것이다.
하필 까치에게 고마움을 느끼다니? 시인은 말한다. <우리네 집 근처에서 한결같이 오 한결같이 살아주어서 정말 고맙다> 라고. <아주 조금 먹고도 살 수 있> 는 까치가 너무 많은 것을 탐하는 우리들 인간 주변에 <살아주기> 때문에 고마운 것이 아닐까. 따지고 보면, 까치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시인의 마음은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속적 이해를 초월한 마음, 욕망을 비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말한다. <무엇보다도 말이다 창 밖으로 네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니는 걸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벼워지겠느냐> 라고. <집 근처에 네가 날아다니지 않으면 우리 동네들은 또 언제 꽃피어나겠느냐> 라고. 집 근처에 네가> 무엇보다도 말이다> 살아주기> 아주 조금 먹고도 살 수 있> 우리네 집 근처에서 한결같이>
세상을 새로운 의미로 빛날 수 있게 하는 까치는 시인에게 정녕코 아름답고 복된 그 무엇, <안복> 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안복> 이 우리의 거칠고도 난폭한 현실에 과연 가당한 것일까? 우리가 「까치야 고맙다」와 함께 「무너진 하늘」(동지, 동월호)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음은 이 때문이다. 안복> 안복>
새들과 <함께> <날아오르> 던 시인이 묻는다. <오늘 산보하다가 숲길에서 죽어 떨어진 까치를 보았을 때 그게 왜 청천벽력이 아니었겠느냐> 라고.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거친 현실을, 그러한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 시인을 읽을 수 있다. 까치 한 마리의 죽음에 <하늘 무너지고 길은 죽고 나는 수심에 잠> 긴다. 이처럼 까치는 단순히 하나의 작은 생명이 아니다. 시인에게 까치는 <하늘의 화육> 이자 <영원한 전설> , <세상의 기적> 인 것이다. 세상의 기적> 영원한 전설> 하늘의 화육> 하늘 무너지고> 오늘 산보하다가 숲길에서> 날아오르> 함께>
신록의 달인 이 5월에 어린이라는 <세상의 기적> 이, 그 <세상의 기적> 을 바라보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의 아름다운 눈길이 살아 숨쉴 수 없다면, 정녕코 이는 <하늘이 무너지고 길(이) 죽> 는 우울함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까치야 고맙다」와 같은 시에서 느낄 수 있는 빈 마음이 아직은 우리의 <근처에서 한결같이 오 한결같이 살아주> 고 있기 때문이다.(문학평론가·서울대 영문과 교수) 근처에서 한결같이>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의 기적> 세상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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