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는 대내적으로는 대기업중심의 경제정책, 대외적으로는 선진국의 경기회복과 엔고현상에 힘입어 중화학제품 수출이 활기를 띠면서 상승국면에 들어섰다. 특별한 경제상황의 변화가 없는한 고율의 성장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날에 대한 희망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의 성장은 기업의 이노베이션이나 구조조정에 기초하였다기보다는 무분별한 확장때문이었다. 또 성장률이 높아지면서 국제수지, 특히 대일무역수지의 적자폭이 커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단기적인 성장률이 아니라 중장기적 성장잠재력의 배양이다. 고성장은 오히려 구조조정을 더디게 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기회있을 때마다 강조하였지만 중장기적 성장잠재력은 효율과 형평의 적절한 조화에서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지난 1년여의 경제정책은 누가 뭐래도 형평과는 거리가 먼 대기업중심의 경제정책이었다. 대기업의 이익단체인 전경련회장단회의가 마치 경제장관회의처럼 된지 오래다. 무분별한 규제완화바람이 재계의 위상을 격상시키더니 정부가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작업을 전경련에 맡겨버린 후부터는 굵직하고 핵심적인 정부정책을 재계총수들이 많이 다루게 되었다. 입법부·행정부·사법부의 3권분립은 옛말이고 이제는 정부·재계·언부의 신삼권분립시대가 도래한 느낌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정부는 국제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고유업무 가운데 하나인 사회간접자본(SOC)구축을 민간에게 넘겨버리는 무모한 계획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의 민간이양은 경쟁력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재벌과 중소기업간의 양극화현상만을 부채질할 것이다.
정부가 SOC의 민자유치를 주장하며 내세우는 논리는 두 가지다. 하나는 민간자본의 효율성을 공공부문에 도입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족한 공공투자재원의 보충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설득력이 없다.
첫번째 문제부터 살펴보자. 민간은 정부가 하는 것보다 더 싸게 SOC를 건설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민간이 더 효율적이라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동안 재벌이 전국토를 투기장으로 만든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길을 닦고, 항만을 만들고, 다리를 놓으라고 허용하는 것은 다시 한번 땅투기의 호기를 주는것이다.
사실 SOC는 초기투자비가 과다하고 자본의 회임기간이 길어 설사 수익성이 높은 경우에도 자본회수에 10∼20년은 걸린다. 따라서 정부는 재벌에게 사업참여의 유인을 주기 위해 기본시설의 사업시행자에게 부대사업을 허용하려고 한다. 이 경우 재벌은 부대사업을 위해 길, 항만, 다리등의 위치나 방향을 바꾸어 대한민국지도를 다시 그릴 뿐 아니라 주위의 땅을 사들이는 데 혈안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땅값은 천정부지로 오를 것이고 우리나라는 또 다시 땅투기라는 망국병을 앓게 될것이다.
물론 정부는 부대사업의 허용조건을 투자비 보전과 정상적 운영을 도모하기 위한 경우로 한정한다고 하나 애매모호하게 들린다. 또 재벌은 투자비 회수가 곤란하다고 느낄 경우 시설사용료를 올릴것이다. 이것은 SOC의 기본취지에 어긋나며 물류비용의 상승을 초래할것이다.
다음으로 투자재원문제를 살펴보자. 재벌들이 길 닦는데 쓸 자본은 어디서 나오는가? 현재 재벌들이 돈은 많은데 투자기회가 없어서 걱정한다면 몰라도 재벌은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지만 항상 돈타령이다. 그렇다고 채권시장이나 주식시장에서의 자금조달이 용이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간접자본구축을 맡기려면 은행돈을 꾸어주도록 하든지, 아니면 외자를 유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같은 자금차입은 정부가 사업주체가 될 경우에도 역시 가능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자본이 부족하여 민자를 유치한다는것은 설득력이 없다. 현재 재벌은 사회간접자본을 위한 민자유치에 비교적 소극적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부로부터 조금이라도 좋은 조건을 따내기 위한 제스처이다. 정부가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그들은 더 소극적이 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낼것이다.
이 법이 통과되어 재벌이 사회간접자본확충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는 날이면 재부가 정부는 물론 언부까지 통괄하게 될것이며, 재벌의 이상비대화로 인한 경제의 양극화는 한국경제의 성장잠재력을 마손할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이 나라의 앞날을 진지하게 걱정한다면 민자유치법안에 부표를 던져야 한다.
그대신 정부는 정직하고 유능한 인사들을 뽑아 정부주도의 사회간접자본확충에 박차를 가하여야한다. 공공은 무조건 비효율적이고 민간은 무조건 효율적이라는 도식적인 사고는 위험한 것이다. 필요한 재원은 세금을 걷든지 외자를 동원하든지 정부가 판단할 문제이다. <서울대교수·경제학>서울대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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