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관용이 정의의 공통분모”/성서플라톤의 관점·법학적 개념 등 다뤄/난제중 난제 논리·과학적 설명 지상에서 사는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물음은 「정의란 무엇인가?」인데, 그러면서도 정의란 무엇인지 한 마디로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동서고금에 수많은 정의론이 있고 특히 정의를 지향하는 법학에서는 정의론만큼 중요한 토픽도 없다. 그 많은 정의론 가운데 우리의 가슴에 또렷하게 정의의 이미지를 그려주는 책으로 한스 켈젠의 책을 들고 싶다.
이 책의 원서를 처음 접한 것은 대학재학 시절이었는데 부피도 꽤 큰 원서를 도서관에서 빌려 흥분하며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 책이 번역된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삼중당간·82년초판)
이 책은 저자가 67년 미국버클리대에서 정년 퇴임을 하면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 강연을 똑같은 이름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강연 내용외에도 정의에 관한 논문, 성서의 정의관, 플라톤의 정의관, 사회기술로서의 법, 과학의 법정에 선 자연법론, 철학과 정치의 절대주의와 상대주의, 인과율과 응보율(응보률)등의 논문이 수록돼 있는 논문집이다.
결코 가볍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렇지만 난제 중의 난제인 정의론을 이만큼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명한 책도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평이다. 우선 저자 켈젠이 원체 유명한 학자이다. 그는 1881년 보헤미아의 수도에서 태어나 빈대학에서 공부했다. 1919년 빈대학 교수가 되어 새로 탄생한 오스트리아공화국 헌법을 기초하기도 했다.
학자로서 「순수법학(REINE RECHTSLEHRE)」을 제창하여 학명을 높이고 1930년에는 쾰른대학 국제법교수가 됐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신분때문에 히틀러에 의해 추방되어 스위스로 망명했다가 194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버드대에서 2년간 강의를 했으나 교수가 될 수 없자 1942년 버클리대로 옮겨 국제정치학 교수로 활동했다. 67년 대학에서 은퇴하고 74년 작고했다. 「히틀러가 미국에 선사한 최대의 선물」이라는 찬사를 들을 정도로 최고의 「망명학자」의 한 명이었다.
「천국 속의 망명」이란 말이 있지만 켈젠은 학문적으로 자신의 「순수법학」이 인정받지 못하는 미국학계에서 외로운 한평생을 보낸 학자이다. 그는 한평생 유대인 학자로, 스스로 「내면적 만족」에만 산다고 고백하면서 법철학과 국제법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켈젠은 철저한 법실증주의자이자 민주주의 이론가, 이데올로기 비판가,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고별강연에서 인류사상 많은 학자들이 정의를 규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모두 실패했다고 지적하고 그 스스로도 한 마디로 정의를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없지만 『나에게 있어서 정의는 민주주의의 정의, 관용의 정의를 말할 수 있을 뿐』이라 했다.
정의의 개념을 손에 쥘듯이 설명하기 보다는 어쩌면 우리의 주변에서도 민주주의와 관용이 가장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온갖 부정의가 창궐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들게한다. 권리도 좋고 분배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와 관용의 정신이 공통분모로 되지 않으면 이기주의와 계획주의의 또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켈젠의 정의론은 사심없이 바른 질서를 추구하는 개인과 국가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책이라 다시 읽고 싶어진다.<서울대법대 교수>서울대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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