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간 개혁명분의 위세(?)에 눌려 효과적인 야당의 대정부 비판이 드물던 차에 국무총리의 급작스런 경질을 둘러싸고 모처럼 여야간의 공방이 본격화된 듯하여 자못 흥미롭다. 야당이 그동안의 수세를 일시에 만회할 듯이 파상적 공세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을 볼 때 우리의 정치수준이 별로 달라진것이 없는 듯하여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는것도 사실이다. 정책을 둘러싼 정면적 비판보다는 상대적으로 지엽적 문제를 두고 발목을 잡는 투의 비판만 제기함으로써 상대를 아프게 하지는 못하면서 기분만 상하게 만드는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스타일의 정쟁에 관해서는 이미 익숙한 터이기에 굳이 신경쓸 일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개혁추진일정에 차질이 생기는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때문에 전혀 외면하기도 어렵다. 그렇지 않아도 금년을 지나면서 선거정국으로 들어가면 개혁의 속도가 둔화되리라는 예측이 없지 않았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기대로 미루어보아 개혁의 적극적 추진이 여측의 입장에서 선거에 도움이 되어야 당연하겠지만 정치현실은 그리 간단한것은 아니다. 개혁의 대상이 분명히 정해진것이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관행화된 비리의 교정이 현재 개혁의 주요과제이기 때문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은 불편해지거나 크게는 구체적 피해를 입어왔다. 선거시 유권자들의 투표행태가 항상 대국적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거와 개혁작업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개혁작업이 갖는 기본적인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개혁의 궁극적 목표가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에 있는데 바로 민주주의에서 중시되는 절차의 문제가 개혁이 일정한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것이다. 만일에 그 한계를 무리하게 넘고자 한다면 개혁의 궁극목표인 민주주의가 스스로 부인될 위험이 있는것이다. 그동안 일각에서 개혁작업추진을 위한 노력을 두고 권위주의의 부활이라는 주장도 있었는데 바로 개혁작업에 불가피하게 내재하는 이율배반적 고민을 건드리는 논의로 여겨진다.
이러한 아픈 구석을 야당이 가만히 둘 이유가 없다. 개혁의 기본의도에 대해서는 동감하지만 법과 제도가 경시되었고 법치대신 인치만이 있었으며 따라서 개혁론은 신권위주의를 낳았다는것이다. 결국 개혁 자체는 찬성하지만 방법론이 잘못된 현정부의 개혁정치는 찬성할 수 없다는것이다.
원칙적으로 개혁의 기본목표는 지난 수십년간 외양만의 민주체제하에서 내용적으로는 불공평하게 제정·집행되어온 법과 제도의 비호를 받으며 굳어져온 비리·부패의 관행과 구조를 혁파하는 일이다. 옳게 제정되고 공평하게 집행되는 법에 대한 존중이 개혁의 궁극적 목표이지만 그 성격을 따지지 않은채 이루어지는 실정법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에의 요구는 탈법적 방식으로 이루어진 비리구조를 외면코자 하는 둔사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할것이다.
현정부가 기본목표로 설정한 개혁정치에 대한 야당의 비판이 다분히 정략적인 고려에 의해 동기화되었기 때문에 순수치 못한 동기는 당연히 비난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민주주의 정치과정은 사적 이해관계의 조정을 통하여 공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여 나가는것이기 때문에 크게 나무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리를 완전히 희생해가면서 공익만을 위해 일하겠다는 그러한 성인군자는 (최소한 정치판에서는) 어차피 없다는 현실이 서로 양해되기 때문에 표방된 공익추구와 함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당의 행위는 민주주의하에서 정당한것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러한 사리 추구행위가 결과적으로 공익달성이라는 대의명분과 연결된다는 전제하에서이다.
이 대의명분은 스스로 갖는다고 해서 있게 되는것이 아니라 명시적으로 제시되거나 또는 비판속에 깔려 있는 정책대안을 통해서 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핵문제 해결안으로 제시된 야당총재의 방북제안, 옥외집회를 통한 UR문제의 정치쟁점화 시도, 신임 총리 인준의 정치쟁점화나 거국내각제 또는 전각료 해임안같이 비현실적이거나 말꼬리나 잡는 듯한 방안의 제시는 야당이 일관된 시국관도 안 갖고 대의명분과 무관하게 당리당략만 생각하는가 하는 의심만 낳게 할 뿐이다.
정부가 개혁정책 추진에 미진하다는 비판이 야당으로서 할 수 있는 당연한 비판이겠지만 우려되는 점은 정략적 이유때문에 큰 문제에서 잔 문제에 걸쳐 모든것을 다 시비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개혁작업 추진 자체가 어렵게 될지도 모른다는것이다.
개혁작업의 진척이 아니라 좌초를 위한 목적으로 모든 문제를 일일이 정쟁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한다면 국민을 위한 야당이라는 명분이 약해진다. 개혁작업 그 자체에 대한 시비가 오직 정략적 동기에서만 연유되었다는 점이 노골화될 때 정부의 다른 일상적 정책집행에 대해 야당이 가하는 비판의 신뢰도도 동시에 떨어진다는 점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할것이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야당이 우려하던 정부와 여당의 독주는 오히려 쉽게 될 수 있음을 야당은 통찰해야 할것이다.<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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