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 34돌을 맞은 서울 수유리 4·19묘역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시대변화를 새삼 실감케하는 장면들이 계속 되풀이 됐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끈것은 최근 4·19 「적통」논쟁을 벌이면서까지 신경전을 펼친 여야정당이 앞다투어 참배하는 모습이었다. 이날 여야정당의 4·19묘소참배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이 정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행해졌다. 따라서 여야합동참배 같은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민주당이 상오 6시 30분 먼저 묘역을 다녀갔고 민자당은 그로부터 1시간뒤인 7시 30분 참배했다. 기타 정당들도 그 뒤 서로 시간을 달리해 각각 추모의 뜻을 표했다.
여야정당이 시차를 둬가며 참배하는 모습은 34년이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라지지 않은 대목이었다. 입으로는 4·19의 숭고한 이념을 앞세우면서도 머리속의 정치적 속셈과 계산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 때문일것이다.
4·19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해석하는 여야정당의 타성은 묘역 곳곳에서 목격됐다. 우선 성역화작업이 한창 진행중인 4·19묘역 입구에는 4·19추모보다 각당의 홍보에 더 큰 비중을 두는듯한 플래카드가 내걸려 물결쳤다. 여야정당이 내건 「4·19혁명정신 문민정부 개혁정신」 「4·19혁명정신 계승하여 이땅에 진정한 민주주의를」등 대형 플래카드는 4·19묘역주위의 추모현수막을 오히려 왜소하게 만들기에 충분 했다. 특히 민주당이 4·19를 기리는 자리에서 조차 『4·19묘역단장을 내세워 4·19를 집권여당의 전유물인 것처럼 오도하려한다면 용납하지 않을것』이라고 주장한것은 주변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4·19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도 정립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대목들이다. 목숨을 바쳐 오늘의 4·19를 있게 한 영령들은 말이 없는데 4·19묘소의 모습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것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4·19 주역은 정의감에 불타는 피끓는 학생들이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새삼 반추해 봐야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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