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타 흐루시초프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서기장으로서 개혁을 추진했던 두 인물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개혁의 좌절을 겪고 권좌에서 물러나야 했던 공통점이 있다. 지난 14일은 흐루시초프의 탄생 1백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날을 맞아 고르바초프등 구소련공산당의 개혁론자들이 그를 기리는 조촐한 행사를 가졌다.
특히 고르바초프는 동병상린을 갖고 있는듯 이례적으로 TV에 출연해 흐루시초프의 업적을 찬양하는가 하면 자신이 운영하는 재단에서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기념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서방세계에서는 흐루시초프를 56년 헝가리자유화운동을 탱크로 짓밟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기억하고 있지만 소련의 지식층들은 그를 스탈린의 폭정을 종식시키고 공산주의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흐루시초프는 개혁정책에 반발한 보수파 공산당정치국원들에 의해 64년 축출됐고 유폐생활끝에 지난 71년 사망했다.
그의 개혁정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고 60년대 그의 이상을 숭배했던 청년엘리트중 고르바초프가 지난 85년 공산당서기장에 취임,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을 추진하게 됐다.
공교롭게도 고르비 역시 지난 91년 보수파 측근들의 쿠데타로 실각위기를 맞고 끝내 권좌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고르비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보다 과감한 변혁을 시도하지 않으면 흐루시초프와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다.
고르비는 최근 한 회견에서 『처음에는 체제가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나중에 보니 흐루시초프와 같은 환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이들 개혁주의자들은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과 과감한 결단만이 수십년간 굳어진 체제를 개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우리도 지난 30여년간의 군사독재정권을 청산하고 문민정부를 출범시킨 후 김영삼대통령의 주도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구소련의 역사적 교훈을 되새겨 볼 때 우리의 개혁도 지도자의 과감한 결단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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