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 “대구폭동-4·3 「항쟁」 표기 불가” 밝혀/여순사건 「반란」삭제엔 신축성/“편협한 역사인식 시정” 계기로 교육부가 「대구폭동」을 「10월항쟁」으로, 「제주4·3사건」을 「제주4·3항쟁」으로 바꾸어 중·고역사교과서에 기술하려 했던 준거안 연구위원회의 시안에 대해 20일 수용불가 입장을 밝힘으로써 「역사용어 변경」문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한 용어변경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현대사를 보는 시각과 역사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는것이어서 앞으로도 계속적인 재연의 소지가 있다.
교육부는 수용불가의 이유를 『두 사건은 논란의 소지가 있어 학계의 정설이 없는 형편이고, 교과서에 수록되는 내용은 보통교육에 적합한 보편적인것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이 두 사건외에 「여수·순천반란사건」은 「반란」을 빼고 「여·순사건」으로 변경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앞으로 연구위원회의 심의, 국사편찬위원회의 자문과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제6차 교육과정 개편에 따라 96학년도부터 사용될 중고교 국사교과서에는 두 사건의 경우 기존용어가 그대로 사용될것같다.
논란이 됐던 시안은 준거안연구위의 현대사분야 3인의 위원중 서중석 성균관대교수가 전담했으며 다른 위원들과 사전 의견조정이 없었던것으로 알려졌다. 진보적 입장으로 알려진 서교수가 그간 학계일각에서 논의되기만 했지 일반의 시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항쟁」의 개념을 사용한것은 『합의를 거쳐보자는 뜻이었다』는 게 논란의 전말이다.
서교수는 대구폭동에 대해 『첫 발생은 대구였지만 이후 경남북, 전남지역까지 사태가 확산됐고 미군정의 실정에 억눌린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점등이 지역과 성격상 용어와 맞지 않는 점이 있어 10월항쟁이라 표현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소장학자와 역사연구자들은 이번 논란을 계기로 기존교과서에 수록돼 왔던 역사용어들에 대한 엄밀한 검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있다.
이들은 『제주4·3사건은 40년이 넘게 역사의 뒤편에 묻혀 있다가 지난 90년에야 교과서에 수록됐다』며 『여순반란사건이 여순사건으로 표현되게 된것도 기왕의 시각에서 보면 엄청난 변화』라고 말했다. 교과서의 성격상 한계가 있긴 하지만 현재 사안에 대한 설명없이 용어만 언급되어 있는 몇몇 사건들도 차제에 누락된 설명을 추가하거나, 사건발생당시의 이념·정권적 입장을 떠난 객관적 용어를 사용해야 할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해 문제제기만 해도 알레르기적으로 반응하는 일부의 편협한 역사인식태도는 보다 성숙한 토론의 장으로 수렴돼야 한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한때는 「10월유신을 구국의 용단」이라 찬양하다가 어느 시기가 지나면 「박정희정권은 철권강압통치로…」라고 입장을 바꾸는 식의 교과서편찬작업은 어불성설』이라는것이다.
한편 교육부는 7차교과서 개편시부터(2000년) 민간출판의 2종교과서로 전환키로 했던 국사교과목을 혼란방지차원에서 현행대로 국정교과서로 존속시킬 방침인것으로 알려졌다.【하종오기자】
◎보수·진보학계의 입장/“대한민국 정통성 부인”·“당시상황 반영 부적절”
「대구폭동은 폭동일 뿐이다」는 논지에서 한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아무리 진보학계의 연구성과가 나왔다 해도 당시를 체험한 세대들로서는 「항쟁」이란 표현은 이미 감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표현 자체로 대한민국은 그 정통성이 부인당한다는 단순명료한 논지로 일관하고 있다.
보수학계는 그 근거로 「10월항쟁」은 북한의 역사서인 조선전사의 표현 그대로이며, 당시 사태의 주동자들이 월북해 북한에서 훈장까지 받았다는 점등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항쟁이란 표현은 자칫 6월민주항쟁등 최근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을 지칭할 때 사용되는 의미의 항쟁과 동일시되는 것을 우려한다.
특히 대구폭동에서의 항쟁이란 표현은 민주화항쟁의 경우와는 엄격히 구분되는 소위 민중사관·계급투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용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시안을 만든 서중석교수등 진보학계는 우선 「대구폭동」이란 규정은 당시 사태의 시·공적 상황에 적합치 못한 용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46년10월1일 당시는 좌우대립으로 정국불안이 이어지고 미군정하의 식량공출로 생활고가 극심한 상태에서 농민을 주축으로 한 봉기의 성격으로 일어난 것이며, 최초 발생지인 대구뿐만이 아니라 경남북 전남 강원지역까지 이어졌으므로 대구(지역)의 폭동(성격)이란 용어는 적합치 않다는 주장이다.
심지연 경남대교수 같은 연구자는 『당시 사건의 지도부는 인민공화국 수립이라는 목표를 가졌지만 대다수 참가자들은 일제이래 누적돼온 실정과 모순에 대한 항거에서 출발했던 것』이라며 당시 미군정 보고서대로 사실만을 적시하는 「소요사태」(CIVIL DISTURBANCE)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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