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의 꿈이 있는 서정 서정의 밑자리는 웅숭하고 깊다. 그 속에 놀라운 생성의 힘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서정은 어느 시대에나 가능성의 문학이다. 그런데, 최근의 우리시가 「서정으로 회귀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그러나 「회귀」가 본질환원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생을 꿈꾸자는 것이다.
김지하의 서정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의 「추억」(「현대시」 2월호)을 읽는다. <한번 만져 내내 잊을 수 없는 그 여자의 흰 살 살자취 없고 흰 빛만 허공에 남아 오늘 나를 산으로도 이끌고 해타는 먼 강물로도 벌판으로도 이끌고 남아 내 속에 든다 호롱불로 타 밤을 밝힌다.> 이 짧은 시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에 민감한 이의 추억을 전해준다. 그래서 흔하고 평범한 추억이야기가 아니다. 상처로 마음에 깊은 구렁을 간직한 이의 이야기이다. 마음에 텅빈 <허공> 이 있다. 그 허공에는 <흰 빛> 의 흔적만이 있다. 이 흔적에 <나> 는 사로잡힌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로잡힘이 실존의 정신분석이 아니다. 그보다 이것이 새로운 삶을 위한 생명력을 불러온다. <내 속> 에서 불을 밝힌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의 <추억> 은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텅빔 속에 충만을 불러오는 의식현상이 되고 있다. 추억> 내 속> 나> 흰 빛> 허공> 한번 만져>
서정은 되돌아 가는 감각이다. 그러나 이것의 가능성은 다시 되돌아오는데 있다. 이러한 의식현상 속에 서정의 변증법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증법이, 김지하의 「추억」에서처럼, 추억의 흔적들이 존재의 전생애에 새로운 생명을 주게 한다. 그것은 그믐밤에 길을 잃은 나그네에게 주어진 호얏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서정은, <호롱불로 타 밤을 밝힌다.>호롱불로 타>
최근의 서정회귀에 대한 우려는 서정의 가능성으로서의 변증법을 잊고 있다는 데 있다. 삶의 문제에 대한 민감한 감각이 아니라 그 문제를 망각하려는 위안의 감각들은 서정의 가능성을 좁힌다. 서정을 편안한 잠을 주는 처소 정도로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다. 물론 세상의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평안을 주는 서정의 효과가 전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서정의 진정한 효과는 상처를 감싸면서 새로운 삶을 추동하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정은 신생의 철학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송재학은 「노래는 왜 금방 핀 홀아비꽃대를 찾아가는가?」(「현대시」 2월호)에서 <어둠을 껴안는 마음> 이라고 한다. 송재학의 시에서도 서정의 가능성들을 찾을 수 있다. 물론 김지하의 그것처럼 유장한 것은 아니나, 그 역시 내면의 추억들로부터 삶의 활력들을 찾고 있다. 이를 그는 <몸의 모든 구멍마다, 썩은 곳마다 쏟아져나오는 노래> 찾기라고 한다. 몸의 모든 구멍마다, 썩은 곳마다 쏟아져나오는 노래> 어둠을 껴안는 마음>
살아갈수록 우리의 마음은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비워지게 된다. 그리고 구멍이 숭숭 뚫리고 찬바람이 드나들게 마련이다. 서정은 이러한 삶의 텅빔속에 충만을 불러오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이고 희망이다. 또한 신생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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