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지 몇년이 지나 기억에서 희미해진 제자가 찾아와 주례를 서달라고 한다. 80년대 전반 암울한 시절, 시대적 고민때문에 늘 어두운 얼굴로 방황하던 그 제자가 이제 사회인이 되어 약혼녀와 함께 나타난 것이다. 별로 스승다운 스승노릇도 못한 선생을 찾아준 사실은 고맙지만 그의 청만은 선뜻 승낙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양가부모의 허락도 받아냈다고 하며 개신교계에선 오래전부터 여자목사도 주례를 맡고 있다고 선례를 들어가며 간청했지만 그의 간곡한 희망을 끝내 거절하고 말았다. 서운하게 돌아간 제자에게 한없이 미안하여 완강하게 거부한 이유를 스스로 정리해 보았다.
우선 무엇보다도 사회통념에 위배된다는 점이다. 신문의 가십란을 장식할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아닌가 꺼려졌다. 나하나 웃음거리 되는 것이야 그런대로 참을 수 있겠지만 제자의 일생에 관련된 중대사를 만화를 만들 수는 없다는 우려였다.
『이 다음 머리가 하얗게 센 후에 주례하지』하였지만 여성에 대한 편견이나 관습이 나이먹는 것으로 대체되어 해결될 수 없음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 걸림돌이 나 자신 그렇게 힘겹게 천착하고 있는 바로 그 전통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선뜻한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여자가 주례를 서서는 안된다는 규정은 전통시대 「경국대전」이나 현재의 헌법 어디에도 없다. 다만 여자가 그런 주요 의례의 주재자가 된 적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관습화하여 전승된 것이리라. 과연 전통은 우리의 뿌리로서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갖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전통에만 매달리면 고루하고 융통성이 없으며 발전에 장애요인이 되기도 한다. 반면 전통을 무시하면 허황되고 위험하며 정체성이 없어진다.
언제나 사회통념이 바뀌어 여자도 거리낌없이 당당하게 제자의 주례를 설 수 있는 날이 우리사회에도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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