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서양문물 조화… 동도서기 주장/민주·법치원리 소개… 해외여행기도 흥미 요즈음 국제화·개방화·세계화라는 말들을 가는 곳, 보는 곳마다 듣게 되고 「제2의 개국」이니 한말의 사정과 방불하다느니 하는 지적도 자주 접하고 있다. 그래서 새삼 옛날 학생시절에 읽은 책 가운데 유길준의 「서유견문」이 생각나 다시 읽어보았다.
이 책은 한국의 개화사와 지성사에서 너무 많이 알려진 책이지만 실상 그 내용이 얼마나 알려져 있느냐에 대하여는 평소에 자못 의심하여 왔다. 나도 학교에선 이 책은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라고 국어시간에 배운것 외에는 내용에 들은 바 없었다. 실제로 읽어보면 이 책은 제목처럼 기행문도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이 서양의 문물제도, 민주정치와 법치원리를 소개 설명하는 내용이다. 나는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학생시절에 꼭 한번 읽고 선각자가 본 당시의 서양사정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개방과 국제화의 의미를 새겨보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한말의 개화사상가 구당 유길준(1856∼1914)에 대하여 새삼 소개할 필요도 없고 1895년에 초판이 나온 이 책이 어떤 경위에 의해 저술되었는지도 많이 알려져 있다.그러나 그가 최초의 일본유학생·미국유학생으로 귀국하여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로 7년간이나 연금생활을 하면서 본서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사실은 오늘날 새삼 상징적으로 보인다.
지금도 구호로는 국제화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방의 준비가 되어있지 아니하고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만이 아니라 한국인의 마음에 아직도 「쇄국」의 그림자가 어딘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솔직한 느낌이 든다. 물론 유길준도 개화를 설명하되 우리의 전통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서양과 전통을 조화시켜 점진적 개화, 동도서기를 하자는 입장이었다.
법에 관하여도 「항구법」과 「변천법」의 조화를 주장하여 역사법학적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발상이 1백년전에 이루어진 사유방식인데, 1세기가 지난 오늘까지 우리 후손들이 얼마 만큼 내실있게 채워 왔느냐는 진단에 있다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최초의 견문서라는 역사성과 현재성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사실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원문 그대로 읽으면 더욱 실감나는데 젊은 세대에는 현대어판이 나온 것이 있으니 그것을 읽어도 좋다 (김태준 역, 박영문고, 1976년). 각종 문물에 대한 용어들이 1세기 동안 어떻게 변천하여 왔는가 원문과 비교하면서 읽으면 더욱 배우는 것이 많을 것이다.
한편 「서유견문」은 한국 최초의 해외여행기로서도 흥미진진하다. 미국유학중 갑신정변의 비보를 듣고 황망히 귀국하는 길에 들른 유럽여행이라 정확히 언제 어디를 방문했는지 불분명하나 본서에는 8개국 37개도시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나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유길준이 본서에서 언급한 서양 각국의 도시들을 돌아보고 「신서유견문」같은 책을 하나 써보고 싶은게 꿈이다.
나뿐만 아니라 오늘날 여행자유화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서양을 다녀 오지만 「서유견문」같은 뜻있는 책은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급변하는 국제화시대일수록 온고지신의 정신으로 전통과 개방의 조화를 꾀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제2의 개국」의 의미를 새기며 「서유견문」을 읽는 맛은 각별하기에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최종고 서울대 법대교수>최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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