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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열혈청년 “출세위해 변절”(개혁풍운아 김옥균: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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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열혈청년 “출세위해 변절”(개혁풍운아 김옥균:13)

입력
1994.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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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객 홍종우/30세 불유학… 조국 근대화운동 야심/귀국길 일서 수구파 유혹에 넘어가/홍문관 「특채」… 요직 거치며 개혁인사 탄압 앞장 1894년 4월14일은 홍종우에 의해 수송돼 온 김옥균의 유해가 서울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된 날이다. 바로 그날 주한 일본공사 오시마(대도규개)는 조선조정에 『암살범 홍종우를 정치에 중용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두달쯤 뒤인 7월1일 조선조정은 전시(임금이 직접 관장하는 과거시험)를 시행해 홍종우(1850∼1913)를 급제시켰고 홍문관 교리로 전격 발탁했다. 이 시험이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를 등용하기 위한 「특채」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황현은「매천야록」에서 『이 특별 전시는 일명 「종우과」로 불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1백년전 조선개혁의 싹을 송두리째 뽑아버린 기회주의자는 이렇게 정치계에 발을 디뎠다.

 <정치무대에 진출한 홍종우는 일본의 승리로 끝난 1894년 8월 청일전쟁 직후 득세한 개화파를 피해 청나라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나 홍종우는 1년6개월 뒤인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면서 일본세력이 약화되자 다시 조선의 정치무대로 복귀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홍종우는 이어 의정부 총무국장, 평리원(지금의 대법원) 재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갑오개혁과 민비시해에 관여한 인사들의 체포를 주도했다. 또한 1896년 8월에는 왕실에서 「일본당」 54명을 축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일본외교문서」는 기록하고 있다.

○몰락한 양반출신

 이후 황국협회에 가담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탄압에 앞장선 홍종우는 그러나 일본의 조선에서의 지배권 확립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홍종우는 1903년 1월 제주목사로 좌천된 뒤 1905년 4월 조선의 정치무대에서 자취를 감춘다. 출세주의자의 예정된 최후였다. 

 홍종우는 근대사연구에 중요한 문헌인 「일본외교문서」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대한계년사」 등에 종종 등장하며 영욕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홍종우는 누구인가. 그는 왜 김옥균을 암살했는가.

 남양홍씨 남양군파의 족보는 그가 조선후기 노론의 명망가 홍명원(1573∼1623)의 9대 자손임을 밝혀주고 있다. 홍종우는 선조 때 예조정랑과 경기관찰사를 역임했으며 또한 당시 최대의 거유 송시렬이 추모비문을 쓰기도 했던 대표적 유학자의 자손이다.

 그러나 그의 족보는 또 그의 고조부부터 4대째 관직에 등용되지 못한 감추고 싶은 사실도 알려주고 있다. 그는 영화롭던 과거를 간직한 몰락양반의 자손이다.

 경기 안산 태생이라는 사실 이외에 유년시절이 알려져 있지 않은 그는 30세 되던 해인 1890년 프랑스 최초의 유학생으로 역사기록에 등장하고 있다.

 4년여에 걸친 프랑스 유학시절 홍종우는 당초 목적했던 법학공부보다 조선역사를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볼테르의 서적 등을 탐독하면서 서구문화와 정치제도를 수용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춘향전」 등 불서

 그는 유학중 2년 동안 파리 귀메박물관에서 연구보조원으로 일했다. 고려불화와 청자등 9백여점을 소장하고 있어 동양미술의 보고로 꼽히는 이 박물관에서 그는 2년 동안 「춘향전」 「심청전」 등 한국고전을 최초로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내기도 했다.

 1894년 네덜란드의 레이더대학 한문학교수 구스타브 슐레겔이 발간한 「퉁파오」(통보) 제5권 잡보란에 「정치적 암살자」라는 제목으로 실린 프랑스 화가 펠릭스 레가메이의 기록은 그에 대한 많은 비밀을 풀어준다. 

 <…홍종우는 1890년 12월24일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도착 즉시 신부들의 보호로 뒤렌가의 성 니콜라스 수도회의 하숙다락방에서 기거했다. 신비와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그는 열정적이며 정치적 관심이 많았다. 그는 배우려는 욕구가 강하고 야심적이었으며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럽문명을 흡수하길 열망했다. 프랑스 정치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그는 몇년 뒤 조선으로 돌아가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같은 근대화운동을 지휘하길 희망했다.

 그는 1891년 5월9일 친교모임인 「여행가의 회」에 참석해 연설을 했다. 그는 지금의 조선이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 있으며 일본에서 깊이 연구해 본 결과 유럽문명을 수입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고 말했다…>

 「정치적 암살자」는 계속된다. 

 <…홍종우는 외무성 건물에서 한불수교조약 체결 당시 서울의 고종황제 궁전에서 만난 적이 있는 한 사람이 자기 앞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앞에서 홍은 감동에 못이겨 코고르등 외무부장관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손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순간 홍은 구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동안 만날 기회가 뜸해졌다. 다시 만난 것은 그가 조선으로 떠나가기 얼마전이었다. 우리는 그의 귀국여비를 마련해주어야 했다. 1893년 12월22일 홍종우는 호텔의 심부름꾼과도 작별을 했다.

 『이 촌뜨기하고 함께 지내느라고 혼났습니다. 내가 5개월 동안 서비스했는데도 그는 동전 한푼 준 적이 없어요』 심부름꾼 소년은 투덜댔다.

 그는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본에 얼마간 머무를 예정이었다. 그는 내가 선물로 준 금촉 만년필을 갖고 갔다. 담배를 문 홍종우는 기다란 회색 한복차림에 똑바로 앉아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치적 암살자」 중에서)

 이쯤에서 「홍종우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그는 상당히 의지적인 인물이었고 몰락한 가문을 일으켜 출세하려는 강렬한 열망을 지닌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위기에 처한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지사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다.

 홍종우는 1893년 1월15일 자신이 불역한 「심청전」의 서문에서도 당시 조선이 처해 있던 지리적·정치적 상황을 발칸반도의 이탈리아와 비교하면서 조선을 둘러싼 중일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도 그의 프랑스 유학시절 『홍종우는 조선의 개화파에 속하는 사람으로 구 제도와 싸우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제주목사로 좌천

 유학시절 개화사상 신봉자였던 열혈청년 홍종우가 개혁의 선봉자였던 김옥균을 살해하고 개혁의 반대편에 섰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변절을 끌어낸 것은 바로 『출세를 보장한다』는 이일식의 유혹이었던 것이다. 출세를 위한 변신, 그것은 1백년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정치적 암살자」의 마지막 부분은 이러한 결론의 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가 귀국 도중 일본에 머무르면서 수구당의 자객 이일식의 사주를 받고 정치이념을 훼절한 것은 수구당 천하의 한국에서 신분보장을 받기 위한 값싼 안전책이었으리라…>

 제주목사에서 물러난 홍종우는 경술국치 직전인 1909년 12월 상하이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러나 육십 노인의 망명생활은 쉽지 않았다. 다시 1년도 안돼 귀국한 그는 한 때 어린 시절을 보낸 전남 무안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족보에는 『1913년 1월2일 무안에서 숨져(서울 마포구) 아현에 묻혔다』고 씌어 있다.<도쿄=글 서사봉기자·사진 손덕기기자>

◎김옥균 아내와 딸은…/“반역자가족 낙인” 형극의 삶/도망… 투옥… 관비… 염병… 막노동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뒤 조선에는 그의 아내와 어린 딸이 남았다. 멸족의 위기에서 결사적으로 도망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부인 유씨와 그의 일곱살난 딸에게는 반역자의 가족으로서 겪어야 하는 염병과 막노동·관비등의 형극과 같은 처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1894년12월 개화파 승려 이윤고에 의해 충북 옥천에서 발견된 이들은 서울로 모셔져 갑오경장과 함께 내무대신에 오른 박영효의 보호를 받았으나 이듬해 박영호가 모함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면서 다시 부초처럼 떠돌아야 했다. 

 유씨는 1894년 박영효에게 10년간의 고초를 적은 편지를 보냈다. 일본 「시사신보」 (1895년 2월16∼17일자)에 실렸던 눈물겨운 편지의 내용을 요약한다.

 10월17일(음력) 희유의 사변(갑신정변)이 일어나 앞날을 걱정하는데 19일에는 체포명령이 내려진다는 소문이 있어 일곱살난 어린 딸을 등에 업고 정든 집을 떠나야 했다. 

 충청도 천안에 있는 남편의 생가를 찾았으나 이미 민씨 일족과 포리들이 도착해 있어 배고파하는 어린 딸을 달래며 우리집 선조의 묘소가 있는 옥천으로 향했다. 

 11월초 옥천에 도착해 면식이 있는 사람 집에 숨었으나 염탐꾼에게 발각돼 을유년 1월19일 옥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그후 정씨 성을 가진 하급관리의 집에서 관비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정씨가 현청의 공금을 축낸 죄로 가산이 전부 몰수되면서 우리 모녀는 다른 집의 관비로 팔려 갔다.

 겨우 비바람이나 막을 수 있는 초라한 움막에서 몸에 익지도 않은 날품팔이로 조석을 끓여야 했고 때로는 하루 한끼로 연명하기도 했다.

 운명은 더욱 가혹해져 임진년 11월부터 우리 모녀는 염병에 걸리고 말았다. 이웃인 임모 여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으나 병이 낫기도 전에 또 품팔이를 시작해야 했다. 우리들을 괄시하고 꾸짖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때는 오직 내 불행만을 탓했을 뿐이었고 조금도 적의를 품거나 뒷날에 가서도 원망할 생각이 없었다. 

 기다림의 보람도 없이 갑오년(1894년) 봄에 남편은 세상에서 유례없는 혹형에 처해졌다. 그 소식을 듣고 천지가 캄캄하여 「죽어 이 쓰라림을 면할까」 생각했으나 얼마후 일본이 손쓴 탓인지 백년이 지나도 씻기 어려운 오욕을 씻을 수 있었다(갑오경장으로 김홍집내각이 김옥균을 복권시킴). 

 그런데 그해 9월 동학 정벌을 위한 군대 중에 이윤고란 사람이 찾아와 여비를 내주었고 일본군대도 얼마간의 돈을 거둬주었다. 금릉위대감(박영효)을 찾아가 위로의 말을 들으니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원통하고 한스럽도다! 

 홍종우에게 원수를 갚고 해외만리의 하늘에 표류된 망부의 원혼을 위로하고 받들지 못하면 눈을 감을 수 없다. 만장의 원통함을 털어 놓고자 하나 흐르는 눈물을 가눌 길 없어 여기서 붓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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