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과 지도자 부자는 핵을 둘러싸고 한반도에서 「제2의 6·25」를 벌일것인가. 많은 이들의 관심 이상의 사항이다. 그러나 북에서는 52세를 맞는 지도자에 대한 칭송 경쟁이 한창이다. 남에서는 눈길속에서 고향 찾는 귀성인파에 관심이 쏠려있다. 「느닷없는 6·25」의 악몽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안쪽에 있다. 도발적 사태에 대한 우려는 괜한 우려이기를 모두는 바라고 있다.
인민군 총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 원수인 지도자의 행방과 행적이 뚜렷하지 않은 점이나 수령이 노구를 끌고 지난달 29일 그레이엄 목사를 만나 클린턴미국대통령에게 메시지를 전한것등의 상징은 악몽과 우려를 줄여주고 있다. 더욱, 침착하게 수령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4권·92년4∼93년5월간)를 되십어 읽어보면 발작적 전쟁도발은 없을 것같다.
지난해 12월23일부터 한국일보에 주간 연재중인 서사봉기자의 「개혁 풍운아 김옥균―암살100년…그의 생애를 재조명」을 보면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 아버지 김형직 어머니 강반석여사 밖에는 존경하는 인물이 없는 수령이 그를 「뛰어난 인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수령은 고균을 「인물」로 보게 되었을까. 「세기와 더불어」 1권 1장 「우리가정」에는 1천자 가량 그에 대한 수령의 「재조명」이 실려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조선의 부르죠아개혁운동에 대해서 말씀하는것도 여러번 들었다. 아버지는 김옥균이 지도한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난데 대하여 매우 아쉬워하면서 개화당이 내놓은 혁신정강중 인권평등, 문벌폐지, 인재등용, 청나라에 대한 종속관계의 폐절을 암시한 독립사상등은 모두 진보적인것이라고 하였다…』
『우리에게 조선력사를 배워주던 선생들은 대체로 김옥균을 친일파로 규정하였다. 해방후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오랫동안 김옥균에게 친일파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가 정변준비과정에서 일본사람들의 도움을 받은것이 친일의 표적으로 되었다. 우리는 이것이 공정한 평가라고 보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력사학자들에게 김옥균의 개혁운동에서 인민대중과의 결합에 주의를 돌리지 않은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렇지만 일본의 힘에 의거하였다고 그것을 친일로 평가하면 허무주의에 떨어진다, 그가 일본의 힘을 리용한것은 친일적인 개혁을 단행하자는데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고 당시의 력량관계를 면밀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것을 개화당의 편에 유리하게 전환시키자는데 있은것이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전술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수령이 아버지에게 들은 갑신정변의 이야기는 58년 3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연설에서 주체역사를』 강조하며 『김옥균은 친일파가 아니다』고 말하자 새 조명이 시작됐다. 서울 상명여대 주진오교수는 64년 북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가 펴낸 「김옥균」(90년 2월·「역사비평사」복간) 해제에서 북에서 어떻게 교시에 의해 역사가 성장하고 축소되는가를 밝히고 있다.
현재 북의 사회과학원 원장이며 부설 역사연구소 고문인 역사학박사 김석형(「고대 한일관계사」의 저자)은 자신의 이론을 변경했다. 53년판 「조선력사」에서 『개화당이 일제의 무력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킨것은 일본침략의 앞잡이 역할에 불과하였으며 개혁내용 자체도 매우 빈약했다』고 평가했다. 이런 그가 수령의 교시 후 김옥균에 대한 평가가 물론 달라졌다.
『김옥균은 근세의 여명기에 조국의 독립을 자본주의 침략으로 수호하며… 첫 『부르죠아』운동을 지도한 애국자이며 진보적 정치활동가』라고 그의 생애와 활동을 재평가했다.
수령의 회고록이 나오기까지 갑신정변을 혁명, 개혁, 운동의 어느쪽으로 규정할것인가는 의문이었다. 71년 발간된 북의 「역사사전」에는 「1884년(갑신)부르죠아 혁명」이라고 했다. 82년 나온 「조선전사」13권서도 갑신정변은 「조선에 있어서의 부르죠아 혁명」이라고 했다.
북의 역사연구소 실장인 이종현이 84년 쓴 「근대 조선역사」에서 혁명은 갑자기 「부르죠아 개혁운동」으로 축소된다. 89년 북의 소설가 박태민이 쓴 「개화의 여명을 불러」(「김옥균」으로 「일월서각」이 복간)에서 개화파 운동은 「부르죠아 개혁」으로 불린다.
수령이 92년 쓴 「세기와 더불어」에는 「개혁운동」이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들여다 볼 대목은 수령이 소련 중국의 영향권을 벗어나는 58년(중국군 완전철수)에 주체를 내세우며 김옥균의 친일을 재조명케 한 점이다.
또한 92년 미국 일본과 가까워지려하면서 수령은 김옥균의 「당시의 력량관계 타산」을 「불가피한 전술」이라고 했다. 수령은 94년의 「세계의 력량」을 헤아려 김옥균유의 「불가피한 전술」을 가져야 한다. 최소한 지도자에게 이 전술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에 평화가 있다. 누구도 평화를 추구하는 수령의 대미, 대일접근을 수령이 친미, 친일이라고 재조명하지 않을것이 분명하다.<본사통일문제 연구소장>본사통일문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