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는 상상에 맡겨/내일부터 연단소극장 대학로 한 구석에 있는 연단소극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극장중의 하나인 이곳에서는 이번 설날부터 독특한 연극을 공연한다.
기자는 불쑥 이 극장안으로 들어가 「물체극」이란 생소한 일인연극을 준비하고 있는 이영란씨(29·여)를 만났다. 그는 뜻밖의 낯선 「불청객」을 맞으며 다소 당황해 했지만 『당신의 작업을 미리 보고싶다』는 당돌한 기자의 요구에는 의외로 웃음을 띠며 받아들였다.
무대는 온통 누런 재생지로 장식돼 있었다. 바닥과 천장, 벽면이 모두 누런 색이다. 무대 가운데는 밀가루 한무더기가 작은 산처럼 쌓여 있다.
암전된 객석에 앉아 있던 그는 그 밀가루 더미를 노려보며 천천히 다가간다. (음악이 흐른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것 같은 몸동작을 연출했다. 밀가루를 뿌리고, 냄새 맡고, 옷 속에 집어넣고, 밀가루로 그림을 그리고… 신기한 모습, 놀라는 모습…. 진지한 탐색끝에 그는 곧 밀가루의 성질을 조금씩 알아낸다.
그는 또 물소리와 함께 물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 미지의 물체와의 결합을 시도한다. 물과 만나 또다른 물체가 된 밀가루 반죽은 수축하고 팽창하며 생명력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느새 그를 장악하고 그를 부자유스럽게 만든다. 코에, 입에, 혹은 몸에 붙은 밀가루 반죽의 움직임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는 커다란 몸짓으로 저항한다. 그는 살아 움직이는 밀가루 반죽을 떼어내기 위해 무대 이곳 저곳에 나둥그러진다. 결국 밀가루 반죽은 그와 분리된다. 그는 그것들을 건조한 밀가루 속에 묻어 버린다.
40분간의 연극이 끝났다. 밀가루와 땀이 범벅이 된 이영란씨는 지친 모습으로 씽긋 웃어 보였다. 연극을 다 보고 나서야 기자는 『줄거리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머뭇거렸던 그를 이해하게 됐다. 이영란씨는 무대에 놓인 밀가루를 상대로 신나게 대화를, 아니 일상의 접촉을 한것이다. 밀가루와 장난을 했다고 해도 좋다. 그러기에 이 연극의 줄거리는 관객의 상상력에 달렸다. 상대역인 밀가루는 흙이 될 수도 있다. 그저 물체이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기자는 함께 밀가루 장난을 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음악과 조명이 더욱 그렇게 만든것 같다. 재미가 있다. 어떤 몸짓은 긴장되기도 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 나름대로 상상하기도 했다. 온갖것을 상상하게 하는 이영란씨의 실험정신이 돋보였다.
「나와 밀가루」라는 제목이 붙은 이 일인극은 이곳에서 설날인 10일부터 28일까지 공연된다. 연출과 주연은 이영란이고 음악은 변규만이 맡았다. 미술학도였던 이영란은 프랑스 연극인 필립 장티를 사사한 재능있는 연극인이다. 90년부터 천과 흙등을 상대로한 물체극을 만들어 왔다.
물체극이란 심오한 뜻이 있는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그렇게 불렀을 뿐이다. 연극인 이영란은 『아이들은 나의 작업을 재미있어 하고 공감하는것 같다. 어떤 물체를 갖고 신나게 노는 놀이 정도로 나의 작업을 보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미지의 물체를 상대할것이다. 278―4907.【김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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