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그림자 모른채 해금 “감격”/조국기후 비슷 북해도서 “개혁완수꿈”/“개국 음모 눈치못채고 마의 청국행/일 “˝상해 데려갈테니 즉살은 말아달라” 암살묵인 김옥균은 일본 내무대신에게 보낸 편지에서 「열대성 기후가 맞지 않아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하다」고 적었다. 이 말은 처절한 고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김옥균의 희망이 배어 있는 표현이었다.
유배지 변경문제는 각의에서 토론에 부쳐져 『김옥균은 출생지인 조선과 기후가 비슷한 홋카이도로 보낸다』 (일본외교문서 제22권)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러한 결정은 일본이 외교적으로 골칫거리가 된 김옥균을 이제 막 개발이 시작된 「동토」로 보내는 하나의 핑계이기도 했다. 일본은 김옥균을 영토의 가장 더운 곳과 가장 추운 곳에 유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혁명을 꿈꾸는 김옥균에게 정치·사회활동이 가능한 홋카이도는 「낙원」처럼 여겨졌다. 김옥균은 1888년 8월1일 하코타테(함관)에 도착해 홋카이도에 첫발을 디뎠고 3일 뒤 홋카이도의 제일 큰 도시 삿포로(찰황)에 도착했다.
김옥균은 다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오가사와라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는 더 이상 어린이와 함께 산이나 들을 헤매는 낙도의 촌부도, 학식 높은 「선생님」도 아니었다.
○혁명지지 호소
김옥균은 홋카이도에서 그곳의 정치계·경제계·관계 인사들과 교류의 폭을 넓혀 나갔다. 그는 명망가들을 만났고 빠르게 친해졌다. 북해학원 설립자인 아사바 시즈가, 삿포로시 이마이 백화점 설립자인 이시다 독사부로, 정치가 나카타니 우키치등이 이때 김옥균과 친교를 맺은 인사들이다.
김옥균의 홋카이도 유배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자유민권운동가들과의 교류이다. 특히 자유민권운동가이자 거물 경제인이었던 가네코 모토사부로(금자원삼랑)와의 교류는 유명한 일화이다.
김옥균과 가네코는 그가 홋카이도로 유배된 직후인 1889년에 만났다. 스무살의 청년이었던 가네코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헌법이 제정되고 국회가 개설되는 정치적 격변을 앞두고 자유민권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신문 창간을 계획했다. 가네코는 신문 창간을 김옥균에게 의논했고 김옥균은 새로 창간될 신문의 주필로 나카에 쵸민(중강조민)을 소개했다. 그리고 새로 창간될 신문의 이름을 「북문」이라고 지어주었다.
후에 일본 자유민권운동의 지도자가 된 나카에는 그 당시 일본 최초의 근대적 정당인 자유당의 대표적 이론가였으나 정치에 환멸을 느껴 국회의원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였다. 「북문신보」는 이들이 의논을 시작한지 2년 쯤 뒤인 1891년 4월에 창간됐다.
김옥균은 홋카이도의 거물들을 만나며 정치활동에 대한 목마름을 풀 수 있었으나 또한 만족할 수는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실패한 「조선개혁의 완수」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급격히 변하는 세계 정세와 동북아 정세, 그리고 조선의 정치상황에 대한 신속한 정보가 필요했고 그의 도쿄행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옥균은 홋카이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두 차례 도쿄를 방문했다. 1889년 9월1일 삿포로를 떠나 도쿄에서 두 달간 체류했고 다시 1890년 4월 도쿄를 방문했다.
두 번째 도쿄방문 중 김옥균에게 예상치 못했던 해방이 찾아왔다. 1890년 11월이었다. 당시는 일본에서 최초로 헌법이 제정되고 국회가 개원되면서 정치범에 대한 대대적인 석방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런 정치적 분위기가 김옥균의 해방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해방! 이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어디서 살든 자유이다!』
마음 속으로 이렇게 울부짖는 김옥균의 뺨 위로 벅찬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방은 그에게 조선혁명을 위한 새로운, 그리고 실질적인 착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김옥균은 오사카, 고베, 나고야등 일본의 대도시를 여행하며 일본의 정치인들을 만나 조선혁명에 대한 지지와 자금지원을 호소했다.
4년의 세월이 흘렀다. 김옥균은 이 4년 동안 일본의 수많은 정치가들을 만났지만 별다른 대책이 서지 않았고 조선에서도 희망적인 소식이 없었다. 그는 지칠 수밖에 없었다.
○홍종우도 동행
이때 (1894년 2월) 도쿄 지포해수욕장 근처의 집으로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양자인 이경방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중국 무호에 있는 내 집으로 놀러오라」는 내용이었다. 이경방은 얼마 전까지 일본주재 청국공사를 지낸 인물로 그와는 막역한 사이였다.
『이 편지는 이경방의 이름을 빌렸을 뿐 이홍장의 초대나 다름없다. 그가 나를 초대한 이유가 무엇일까』
김옥균은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강화되고 있는 러시아의 남진정책이다. 조선에서 점점 득세하고 있는 러시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국은 지금 조선에 대한 정책 (속방화)을 바꾸고 있다. 조선, 청국, 일본의 연합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싶은 것이다』
김옥균은 청국행을 결심했다. 이홍장을 만나 조선개혁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의 지원을 얻어낼 작정이었다.
이때 그의 지포 집에는 민씨일파가 김옥균 암살을 위해 파견한 이일식과 홍종우가 드나들고 있었다. 이일식도 김옥균에게 이경방을 만나볼 것을 권해온 터였다. 이일식은 『홍종우와 상하이까지만 가면 은행 천풍전장에서 돈을 찾을 수 있으니 여비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며 김옥균의 청국행을 부추겼다.
김옥균은 1894년 3월25일 고베(신호)항에서 홍종우, 기타하라(본명은 와다), 우푸런과 상하이행 세이케이마루호에 올랐다.
새로운 희망을 안고 떠난 그 길은 그러나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의 죽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정부에 의해 조직적으로 모의되고 있었다.
「김옥균 등 암살계획에 관한 민영익의 담화보고 건」 (일본외교문서 제27권).
당시 나카가와 쓰네지로(중천항차랑) 홍콩영사가 우츠(륙오)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의 제목이다. 이 문서는 1894년 2월10일 일본 외무성에 접수됐다.
<이날 (1894년 1월31일) 하오6시께 민영익이 찾아왔다. 그는 이세식 (이일식의 별명)이 보낸 전보를 보여주며 이 사실을 일본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전보는 이세식이 홍종우 등과 공모해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일본에 통보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오사카부 경부장에게 이세식의 거동을 주목하라고 급신을 보냈다>이날 (1894년 1월31일) 하오6시께 민영익이 찾아왔다. 그는 이세식 (이일식의 별명)이 보낸 전보를 보여주며 이 사실을 일본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전보는 이세식이 홍종우 등과 공모해 김옥균을 암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일본에 통보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오사카부 경부장에게 이세식의 거동을 주목하라고 급신을 보냈다>
김옥균 연구가로 이름있는 교포 금병동씨 (일본 조선대 강사)는 이 문서의 의미를 이렇게 해석했다.
『일본은 김옥균이 암살되기 거의 두 달전 암살계획을 알았습니다. 암살자들의 이름을 알았고 그들의 거처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암살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방조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김옥균의 암살에 가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는 또다른 증거도 제시했다. 당시 주일 청국공사 서승조가 이홍장에게 보낸 비밀전보였다. 1886년 1월7일 청국정부에 접수된 이 비밀전보는 「청 광서 중일교섭사료(제9권)」에 실려 있다.
<최근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외무대신과 상의했다. 그는 『일본인을 파견해 김옥균을 데리고 상하이에 갈테니 그때 중국측에서 체포해 달라. 그러나 감금은 하되 절대 즉살하지는 말아달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 나는 좋다고 승낙했다>최근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외무대신과 상의했다. 그는 『일본인을 파견해 김옥균을 데리고 상하이에 갈테니 그때 중국측에서 체포해 달라. 그러나 감금은 하되 절대 즉살하지는 말아달라』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 나는 좋다고 승낙했다>
「즉살하지 말아달라」는 외교적 표현은 사실 즉살해도 좋다는 뜻을 넘어선것 밖에는 이해할 길이 없다. 조선, 청국, 일본의 이런 조직적인 암살계획에 의해 김옥균의 목숨은 계속 위협받고 있었던 것이다.
1894년 3월28일 한낮, 상하이 뚱허양행에서는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개혁 풍운아 김옥균의 한많은 일생이 허무하게 끝나는 순간이었다.<도쿄=글 서사봉기자 사진 손덕기기자>도쿄=글 서사봉기자>
◎짧은 인연… 아이낳은 두 여인 잇었다(일본여인과의 사랑:하)/신분차이 불구 밀애 딸 출산/마쓰노/일찍사망… 아들도 행방몰라/야마구치
김옥균에게는 아이를 낳고 살았던 일본여인도 둘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인연은 모두 짧은 인연이었다.
마쓰노 나카는 김옥균의 딸 스즈키 사다를 낳은 여인이다. 김옥균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인이기도 하다. 마쓰노는 김옥균의 친구이자 거물 정치인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복택유길)집의 하녀였다.
신분 차이가 컸던 이들의 사랑은 은밀하게 이루어졌고, 그래서 세상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김옥균보다 여덟 살 아래였던 마쓰노는 그의 망명직후 후쿠자와 집에서 만나 사랑을 나눴다.
이들의 관계는 김옥균 암살 직후 벌어진 일본언론의 김옥균에 대한 대규모 추모특집에서, 그리고 김옥균을 추종하던 일본인 모임「고균기념회」가 1930년대에 벌인「김옥균 혈육찾기운동」에서 비교적 상세히 밝혀졌다.
『그 분이 살아계셨으면 지금 여든 다섯인데…』 고균기념회가 발행하던「고균」지 기자는 35년 당시 77세였던 마쓰노를 찾아내서 「고균」제3호에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마쓰노는 긴 망설임 끝에 김옥균과 자신 사이에 사다라는 딸이 있는데, 사다는 그의 오가사와라 유배 직후 태어났다고 털어놓았다. 스즈키 사다의 성은 마쓰노가 김옥균과 헤어진 뒤 스즈키(영목)씨와 결혼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스즈키 사다(당시 51세)는 1937년 3월28일 신조지(진정사)에서 열린「고균선생 제44회 추도법회」에 그의 유일한 유족으로 참석해 분향했다.
김옥균은 1885년 오사카의 한 절에서 숨어사는 동안 과부이자 불교신도인 야마구치 나미를 만났다. 한 살 아래였던 야마구치 나미와 김옥균의 관계는 그러나 6개월도 계속되지 못했다. 김옥균은 그해 9월 도쿄로 돌아가야 했고, 야마구치는 다음해 4월 아들 후사키치(방길)를 낳았다. 뒤늦게 사실을 전해 들은 김옥균은 약간의 돈과 시를 쓴 부채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절에 맡겨진 후사키치는 어머니와 그를 돌보던 절의 주지가 얼마후 세상을 떠남에 따라 목장과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힘겹게 생을 꾸려간 것으로 전해진다.
1894년 아사쿠사지(천초사)에서 열린 김옥균의 장례식 때 장례위원회는 후사키치를 상주로 삼기 위해 백방으로 찾았으나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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