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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까만점 “저기가 바로…”(남극점에 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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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까만점 “저기가 바로…”(남극점에 서다:1)

입력
1994.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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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공격대장 탐험기/“해냈다” 뭉개진 얼굴엔 진물·눈물/폭풍설·강추위 44일의고통 눈녹듯 오늘은 1월 9일(현지시간·이하 같음). 패트리어트 힐을 떠난지 43일째에 접어든다. 상오 6시께 천근같은 몸을 겨우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오니 오늘 역시 시계는 제로.

 고통의 나날들이 이제야 마무리될 순간에 이르렀다고 짐작만 할뿐이지 바로 내 발 끝마저 보이지 않으니 극점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폭풍설과 짙은 구름으로 시야가 완전히 막히는 화이트 아웃(WHITE OUT)현상. 안개와 구름이 낮게 깔려 시야를 완전히 막고 있다. 나의 힘으로는 어떻게 이것을 걷어낼 도리가 없다.

 꿀꿀이죽으로 아침을 때우고 또 다시 행군에 나섰다. 대원들 모두가 아무 말이 없다. 승환·재춘·성택 모두 얼굴이 퉁퉁 부어 진물이 줄줄 흐른다. 세찬 바람을 정면으로 맞은데다 강한 자외선까지 비치니 성할리가 없다. 그들이 보는 내 얼굴도 마찬가지일것이다.

 GSP(위성을 이용한 위치판독기)로 방향을 계속 점검했다. 앞서 가는 대원들의 모습조차 안 보이니 서로 고함을 질러 방향을 알고 다시 나침반으로 정확한 길을 잡는다. 썰매를 조금만 잘못 운행하면 금방 서경(서경)이 몇 도씩 바뀌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는것이다. 어제(8일) 33㎞를 걸어 남위 89도10분 지점에서 숙영을 했으니 극점은 코 앞이라고 짐작만 할뿐이다.

 오늘도 기온은 영하 20∼30도를 오르내린다. 바람도 초속 20m가 넘었다. 앞서가는 대원들이 끄는 썰매가 두르륵 두르륵 소리를 내면서 잘 미끄러져 간다.  그러나 센 바람에 썰매가 자꾸 옆으로 밀려 끄는데 너무나 힘이 든다. 잠시 쉴 때마다 먹는것도 귀찮다. 코 끝에 달린 고드름이 입가에까지 내려와 냉기가 잇속까지 스며 들었다.

 저녁 7시께. 남위 89도46분15초. 서경 89도18분17초 지점에서 전진을 멈추고 텐트를 쳤다. 워낙 추워 그냥 방한화를 신고 안으로 들어와 눈을 털어내니 텐트 내부에 눈이 가득 쌓였다.

 다시 밖으로 나왔다. 화이트아웃현상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왜 낮에는 없어지지 않고 그토록 괴롭힐까』원망을 해 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늘 그러하듯이 망원경을 꺼내들고 저 멀리 빙원을 살펴 보았다. 수천리 떨어진 극점을 눈앞에 잡아두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출발때부터의 버릇이다. 이 외로운 빙원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항상 망원경을 통해 저 멀리를 보게 만든다.

 망원경 방향을 이리저리 돌렸다. 갑자기 한 지점에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멈춰졌다. 아주 먼 곳에 까만 점이 불쑥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극점이 보인다』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 극점이 보였다. 남위 90도 지점임을 상징하는 미국 스콧―아문센기지의 은색 돔이 드디어 시야에 나타난것이다.  『바로 저기다』 대원들 모두가 밖으로 뛰쳐 나와 망원경을 돌려 보며 감격에 몸을 떨었다. 모두들 잠을 이루지 못했다. 4명이 엉겨 붙었다 할 정도로 꼭 붙어 누운 잠자리에서 감동의 거친 호흡이 서로에게 전달됐다. 바로 내일이면 극점을 밟는것이다.

 1월10일. 44일째다. 오늘도 기온은 영하 21도. 상오 8시 숙영지를 떠나면서 망원경으로 계속 남극점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이제 25㎞밖에 남지 않았을것이다. 다행히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씨다. 묵묵히 걸었다.  5∼6시간을 걸었을까. 망원경 없이도 우리의 시야에 극점이 들어왔다. 까만 점이 빙원위에 선명했다. 몇 시간만 더가면 극점에 이르는것이다.

 극점이 가까워 지면서 우리는 횡대로 늘어서서 걸어갔다. 극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를 마중나온 고인경단장, 정길순대원, 윤평구기자등의 모습도 아련히 보였다. 드디어 하오 6시30분(한국시간 1월 11일 상오 6시30분). 대망의 극점을 밟았다. 김승환 유재춘 홍성택등 우리 4명은 썰매를 끌고 극점을 표시하는 대형 간판 주위를 빙 돌았다. 그리고 태극기를 스키끝에 매달아 극점에 꽂았다.

 한국인의 탐험심과 개척의지를 사상 처음 남극점에 세우는 순간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마중나온 고단장등과 얼싸안고 울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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