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도장은 물론 통장도 없는데 돈을 내주는 은행이 어디 있어요』 24일 상오3시께 「큰손」 장령자씨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서울지검 1015호 량인석검사실. 평소 차분하고 치밀한 성품과 수사자세로 정평이 있는 량검사의 노기 섞인 고함소리가 문밖 복도에까지 들렸다.
량검사는 장씨가 92년 10월 사채업자 하정림씨가 서울신탁은행 압구정동지점에 예치한 30억원을 불법인출한 이른바 「불비거래」의 경위를 추궁하고 있었다.
당초 장씨는 지난해 10월 25일 김칠성서울신탁은행 전압구정동지점장을 시켜 하씨의 도장없이 통장만으로 돈을 빼낸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장씨의 직접진술은 김전지점장이 당시 도장은 물론 통장도 없이 빈 손으로 거액을 인출했다는 것이었다. 량검사는 장씨의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거듭 『상식에 맞는 말을 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장씨의 진술은 거짓이 아니었다.은행측은 김전지점장의 「얼굴」만 믿고 다른 고객이 맡긴 거액의 예금을 선뜻 내준 것임을 확인했다.
량검사의 노여움은 『이럴 수가…』하는 탄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미심쩍은 듯 『은행은 사후에 도장과 통장을 확인하지도 않았나요』라고 되풀이 묻고 있었다.
량검사로부터 「장회장」으로 불린 장씨는 무안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혼자서 『그게 뭐 놀랄 일인가』라고 반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검사도 놀라게 만든 장씨는 상식을 뛰어넘는 기발한 수법을 동원한 희대의 사기범인가.
결코 그렇진 않다. 장씨의 범행은 금융기관이 지켜야 할 기본적 원칙마저 예사로 무시한 은행측의 협조없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것이었다. 「큰 손」 장령자는 실명제등 갖가지 규제장치는 아랑곳 없이 고질적 부조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은행등 금융구조자체와 「공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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