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보다 안면」 병폐확인/대출때 14명이름 도용도 금융실명제의 구멍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이철희·장령자씨부부의 거액어음사기사건은 실명제의 허술해진 그물망을 뚫고 일어난것이었다. 서슬퍼런 긴급명령이 발효된지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실명제의 「말초신경」격인 금융기관 창구에서는 버젓이 탈법·위법사례가 벌어지고 있는것이 확인됐다.
이·장사건과 관련, 은행감독원의 10개 금융기관(11개 점포)에 대한 특별검사결과 동화은행 삼성동출장소와 삼보상호신용금고등에서 금융실명제 위반사례가 적발됐다. 또 동일인여신한도 위반을 비롯, ▲폐업업체에 대한 수표책 지급 ▲은행간부의 일반업체임원 겸직 ▲제3자 위법인출 ▲출장소장의 불법지급보증 ▲청탁대출등 금융기관이 저지른 탈법사례만도 10가지에 달하고 있다.
감독원관계자들은 『금융기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불법·변칙거래가 이번 이·장사건에 총집결된 느낌』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물론 관련금융기관 당사자들은 『돈만들기에 일가견이 있는 장씨에게 금융기관 직원들이 놀아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번 「이·장사건」에는 실적경쟁에 시달리고 「규정보다는 안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금융권의 고질적 병폐가 적잖이 작용했다는것이 조사당국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동화은행 전삼성동출장소장 장근복씨는 지난해 11월초 윤·장·이·김·정모씨등 5명의 이름을 허락없이 도용, 장씨의 자금 1백32억원을 양도성예금증서(CD)에 예치했다. 실명제이전부터 검은돈의 전형적인 예금유치수법으로 이용된 「도명계좌」가 「큰 손」과 점포장의 공모하에 개설된것이다. 그리고 법인거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출장소장임에도 불구, 일체의 대출기록을 남기지 않은채 장씨에게 유평상사발행어음 50억원을 변칙 지급보증해줬다.
삼보상호신용금고는 장씨자금 1억여원을 5개의 차명계좌로 나눠 예금받은뒤 구좌개설과 동시에 무려 40억5천만원을 대출해줬다. 한 사람에게 최대한 7억2천만원이상은 대출할 수 없는 삼보측이 장씨에게 제공한 돈은 한도의 13배가 넘는 93억원에 달했다. 또 돈은 장씨 한 사람에게 갔는데 무려 14명의 이름이 동원됐다. 만약 장씨가 「무사히」부도를 막았다면 이같은 구멍뚫린 실명제그물은 세상에 공개되지도 않았을것이다.
농협 신용산지점과 서울신탁은행 이촌동지점은 아예 문을 닫은 기업에 당좌어음과 수표책를 나눠줬다. 두 은행은 포스시스템(부도)대표 조평제씨가 운영하던 한국컴퓨터피아가 작년 3월 폐업했음에도 불구, 8월까지 1백30여장의 어음·수표를 교부했으며 이중 상당수는 결국 장씨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서울신탁은행 압구정동지점의 김칠성전지점장은 장씨에게 유평상사를 소개시켜준뒤 「은행원 겸직 불가」조항을 어겨가면서까지 이 회사 이사직과 은행간부직을 겸임했으며 하모씨 명의의 30억원예금을 본인허락도 없이 장씨에게 불법 인출해줬다.
관련금융기관들은 이에 대해 한결같이 『개인적 행위』라고 일관하고 있지만 사고당사자인 장전소장 김전지점장은 『예금유치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기관들의 제살깎기식 실적경쟁이 가속되고 본점으로부터 「계수증대」재촉에 쫓기다 보면 한도위반이나 당좌관리는 물론 실명제위반의 「위험」도 감수할 수밖에 없다는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처럼 공개화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점포장 재량으로 실명제 그물망쯤은 얼마든지 뚫을 수 있음이 입증됐다.
또 이번 금융기관부당대출에서 장씨는 10여년전부터 알고 지내던 금융계인맥을 동원했다. 우선 포섭대상도 역시 금융계인사들이었다. 금융계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장씨는 「법보다는 역시 안면」이 앞선다는 「현실법칙」을 앞세워 촘촘하다는 법망을 뚫고 나가려 했던것이다.【이성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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