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하와이에서 요양중이신 정일권 선생을 뵙고, 함께 저녁을 드는 자리에서 건담을 자랑하시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로만 여겨지는데, 오늘은 선생께서 말없이 고국땅에 돌아오시니 새삼 소업무상함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사, 정일권 선생은 세가지 면에서 나의 선배이십니다.
우선, 연치에서 9년 선배가 되시고, 1950년 6·25 전란이 발발했을때, 그분은 3군 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의 중책을 맡은 육군 소장이오, 나는 육군본부 작전정보과에 근무하는 육군중위의 신분이었으니, 군대생활에서도 대선배이었습니다.
또한, 1964년부터 70년까지 그분이 6년8개월간 국무총리를 역임하신 1년 뒤에 내가 총리직을 맡게 되었으니 이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청사 선생과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나라일을 걱정하게 된 것은 5·16 혁명 다음부터의 일입니다.
1963년, 주미대사를 그만두고 당시 옥스포드대학에 적을 두고 있던 그분을, 파리에서 만나 『귀국하면 외무부장관으로 천거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그분은 기꺼이 제3공화국 첫내각의 외무부장관으로 일하게된 것을 지금도 감회깊은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청사 선생과 박정희대통령은 동갑이면서, 두분이 군에서는 선후배 사이였습니다만, 5·16후에는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공화당 의장, 국회의장직을 맡는동안 지성으로 박대통령을 보필하였습니다.
청사 선생은 6·25 전란중에는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걸고 앞장서 주셨고, 또한 개발시대에는 외교분야에서, 행정수반으로서 큰 업적을 남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공적을 외면한채, 그분을 부정적인 말로 평가하려는 것은 온당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사 선생은 그분이 간직한 생활신조인 노력, 인내, 자제하는 마음과 몸가짐을 한번도 흐트러뜨리는 일이 없이 어떠한 자리에 앉든, 맡은바 직책을 성실하게 완벽하게 최선을 다해서 말없이 수행한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생자필멸이요, 회자정리」라고는 합니다만, 아직도 정정하게 살아가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하실 일이 남아있을 선생께서 이렇게 표표히 떠나시다니 참으로 허무한 심정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오직 선생의 명복을 빌 따름입니다.
1994년 1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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