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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목사(장명수 칼럼: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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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목사(장명수 칼럼:1633)

입력
1994.0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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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일 76세로 파란많은 운동가의 생을 마감한 문익환목사는 격동의 현대사를 가장 떳떳하게 살고간 한국인이었다. 「싸우는 목사」이고, 「꿈꾸는 운동가」이고, 악법에 몸을던져 그법을 깨려는 격렬한 행동인이었던 그의 주변에는 지지자뿐 아니라 비판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앞에서 지지자와 비판자들은 한마음으로 「떳떳한 삶」의 무게를 새삼 확인하고 있다. 1989년 3월20일 그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통일논의를 나누었을때  「싸우는 목사」 「꿈꾸는 운동가」에대한 비판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가 김일성과  「사회주의식 포옹」을 나누는 장면이 신문·방송을 통해 전해지자 온국민이 충격을 받았다. 오랜 민주화 투쟁으로 신뢰를 쌓아온 그는 하루아침에「소영웅주의자」 「몽상가」 「감상적 통일지상주의자」 「정치목사」라고 매도당했다. 재야에서조차 엄청난 여론에 밀려 그의 방북을 비판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방북후 일본에 머물고 있던 그는 귀국을 하루앞둔 4월12일 동경의 한 호텔에서 한국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 응했다. 나는 그에게 속속들이 의심에찬 질문을 던졌는데, 안기부의 조사관을 무색케하는 그 질문들을 다시 읽으면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5년만에 다시 읽는 그의 대답은 구구절절 옳다. 자신의 방북으로 온나라가 들끓는 속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남한민중을 대표하는 한사람으로서 김일성을 만나 통일에 관한 그의 생각을 타진하고 돌아왔다. 누구든 되도록 많이 그곳에가서 그쪽의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고 오는것은 남한에 손해나는 일이 아니다. 정부는 나를 잡아넣을 생각만 하지말고,나의 방북으로 얻은것을 이용해야 한다…』

 『내가 남한을 비판하는 강도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비난, 6·25를 일으킨 김일성과 대화해서는 안된다는 비난이 있는데, 역사의 매듭을 풀자는 이마당에 그런 비난을 앞세우는것은 매듭을 풀지말자는 말과 다름이 없다…』

 『내가 감상적이고 환상적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적감성은 약점이 아니고 강점이다. 나의 방북은 시적 투시력과 정치적 리얼리즘의 결합이다. 70년대이래 많은 시인들이 감옥에 갔다는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시적 투시력으로 역사의 저쪽을 꿰뚫어볼수 있어야 한다…』

 『방북후 내가 외국기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당신은 귀국하면 구속될것인가」라는 것이었다. 나는 악법도 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므로 피하지않고 귀국하여 재판을 받겠다. 나는 한평생 잘못된 법과 제도에 몸을 던져 그것을 깨려고 노력해왔다…』

 『나는 늘 정도를 가려고 애쓰고있다. 극우의 눈에서 보면 나는 좌경화한 사람이고, 극좌의 눈에서 보면 우경으로 보일것이다. 그러나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의 방북이 당장 통일논의를 냉각시키고, 그로인해 남북관계가 악화된다해도 그것은 잠깐일뿐, 역사의 큰 흐름을 막지는 못할것이다…』

 그는 「왕조시대」에 불의앞에서 『아니오』라고 소리치던 큰 선비였다. 우리는 그의 일거일동이 뉴스가 되고, 희망의 등불이 되던 암울하던 시절을 결코 잊지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그를 보내며 어떤 벼슬의 무게와도 견줄수 없는 떳떳한 삶의 무게, 한 운동가의 꿈과 시적 투시력이 잡아낸 진실의 무게를 보고 있다.【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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