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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난제」해결 외교력 과시/클린턴 유럽순방 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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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난제」해결 외교력 과시/클린턴 유럽순방 결산

입력
1994.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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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핵·나토 확대문제 등 처리/시리아-이 평화정착 계기도 마련 클린턴미대통령은 16일 러시아를 비롯한 동서유럽 순방후 다시 제네바에서 시리아의 아사드대통령을 만나 「극적인 평화타협」을 이끌어내는 성공을 거두면서 1주일간의 외교여행을 모두 끝냈다.

 이번 여행은 첫 유럽순방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한곳에 느긋하게 발을 붙여보지 못한 바쁜 일정이었다는 점에서도 눈길을 끌었다.

 클린턴은 94년 신년벽두를 장식한 유럽여행에서 두가지 중요한 일을 해냈다. 첫째는 우크라이나 핵무기의 처리이다. 소련이 갈라지면서 우크라이나에 무려 1백76기의 장거리 미사일과 핵탄두 1천8백개를 남겨놓았다. 이웃 벨로루시에도 81개의 핵탄두가 배치된채 이를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는 이 핵무기만은 러시아로 돌려달라고 여러번 교섭했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

 둘째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확대문제를 잡음없이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소련이 붕괴한 후 모스크바의 지배를 벗어난 일부 동유럽국가들은 곧장 나토가입을 희망했고 미국 역시 나토조직의 발전적 확대라는 입장에서 가입신청이 들어오면 이를 수용할 태세였다. 그러나 막상 헝가리·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등이 가입을 신청했을때 국제문제로 복잡해진 클린턴은 오히려 이들 4개국에 가입을 연기해줄것을 바라며 이를 어떻게 설득할것인가가 고민거리였다.

 클린턴은 이 까다로운 문제를 1주일간의 바쁜 일정안에 거뜬히 해결했다. 우크라이나 및 벨로루시의 핵문제는 러시아를 중간에 내세워 해결했다. 미·러·우크라이나는 3각협정으로, 미·벨로루시는 쌍방협의를 통해 7년이내에 모든 핵무기를 철거키로 합의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상당한 추가경제원조를 주는것으로 대처했다.

 나토 확대문제는 처음에가는 미국이 원했다가 러시아의 「당분간 연기」정책으로 돌아선데 문제가 있었다. 폴란드·헝가리등을 곧장 받아들일 경우 이는 곧 구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미국이 그대로 수용해 자칫하면 친선관계로 돌아선 러시아를 또다시 적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을 위험성이 있었다. 클린턴은 자신에 앞서 폴란드 출신인 미합참의장 샬리카시빌리대장을 먼저 특사로 폴란드·헝가리등에 보냈다.

 이때 이들 국가에 안보공약이 의무적으로 따르는 회원국자격 대신 「상호협의」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동반자」라는 문구로 나토와 연대관계를 맺는것으로 귀결지었다. 동유럽국가와 러시아의 입장을 다같이 고려한 타협책이어서 일단 양쪽 모두로부터 양해를 얻게돼 클린턴 외교는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클린턴은 여세를 몰아 시리아의 아사드대통령을 제네바에서 만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평화노력에 대한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받았다. 필요하면 미군을 골란고원에 평화유지군으로 파견한다는 카드로 이스라엘·시리아 관계개선을 약속받은 것은 우크라이나의 핵해결에 못지않은 외교적 성과였다.

 이만한 광범위한 외교성과는 탈냉전시대의 「유일한 강대국」이 된 미국의 지도자가 아니면 성취하기가 불가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런 클린턴의 외교성과가 세계평화의 길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클린턴의 국내에서의 위상이 높아져야 한다. 그는 현재 아칸소주지사로 있던 시절에 화이트워터라는 부동산회사에 불법저금을 한것과 관련, 부정을 했을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자신을 조사해야 할 연방특별검사를 임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워싱턴=정일화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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