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담 9월,장세동 10월… 남북정상회담 추진 분단의 한이 큰만큼이나 남북간 「교섭」의 내막도 겹겹이 싸여 비밀스런 부분을 적지않게 간직하고있다. 바로 이 내밀한 부분이 판문점을 넘나든 밀사라 할 수 있다. 비밀외교를 수행한 밀사는 72년의 「이후락―박성철」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그 이후에도 남북한의 밀사잠행설이 끊이지 않았지만 남북 양측은 부인이나 묵살로 일관해왔다.
그러나 최근 「이―박」이후에도 양측의 실력자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간 것으로 알려져 비상한 관심을 촉발시키고있다. 5공시절인 85년 남측의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과 북측의 허담 당시 노동당비서(91년 사망)가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서울과 평양을 은밀히 오갔다는 것이다. 허비서는 그해 9월4일, 장부장은 10월16일 각각 판문점을 통해 서울과 평양에 소리 소문없이 도착, 3일간 체류했다. 장·허 두 밀사는 김일성주석과 전두환대통령을 면담, 고위층의 친서를 전했다. 두 밀사의 「활약」으로 남북은 정상회담의 연내 성사에 합의했으나 주변상황의 변화는 결국 회담을 무산시키고 말았다.
전대통령의 허비서면담은 85년9월5일 상오 경기기흥에 있는 최원석 동아그룹회장의 별장에서 이루어졌다. 청와대가 아닌 민간인 별장을 택한 이유는 보안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별장의 당명도 청와대경호실에 의해 「영춘재」로 바뀌어 면담시간동안 청와대별채로 사용됐다. 1시간 조금 넘게 이어진 면담에서 허비서는 전대통령의 평양방문을 희망하는 김주석의 친서를 전했고 전대통령도 쾌히 응낙했다. 이 자리에는 우리측에서 장부장 박철언 안기부장특보가, 북측에서는 허비서의 수행원인 한시해 노동당부부장 최봉춘·안병수 비서국직속과장중 한부부장만이 배석했다.
이날 면담은 전대통령 특유의 허심탄회한 얘기와 허비서의 정중한 태도로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였다고 한다. 전대통령은 허비서를 보자마자 『서울에서 평양까지 차로 서너시간밖에 걸리지않는데 이렇게 오기 힘드니 비극이다. 주석께서 특사파견의 영단을 내린데 감사한다』고 치하했다. 이에 허비서는 극존칭의 인사말을 하고나서 김주석의 친서를 읽었다. 친서는 정중함으로 가득찬 표현으로 전대통령의 방북을 청하고 있었다. 전대통령은 『기쁘게 생각한다』며 수락의 뜻을 표했고 허비서는 『각하가 군사분계선을 넘어 평양에 오시게 되면 분단 40년사의 전환이자 일대사건』이라고 장단을 맞추었다. 대화도중 허비서는 『김주석이 전쟁중에 서울로 나오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서울의 대좌가 성공리에 끝나자 얼마후 장부장이 평양으로 밀행, 85년10월17일 주석궁에서 『나(전대통령)의 평양방문후 주석께서 서울을 방문해달라』는 전대통령의 친서를 김주석에게 전했다. 정상회담을 위한 밀사파견이 이루어지기까지 막후에서 양측의 다양한 접촉이 전개됐었다. 그해 4월24일 인도네시아의 비동맹회의에서 이세기 통일원장관(현 민자당정책위의장)이 손성필 북한적십자위원장에게 모종의 뜻을 전했고 5월28일 서울의 남북적십자회담에서도 양측의 막후협상이 있었다.【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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