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의 힘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의 통념 속에 자리잡고 있는 국력은 대체로 경제력과 군사력이다. 세계사의 경험에서 봐도 근대의 주요 국가들은 경제국가인 동시에 군사국가였으며 곧 잘 열강이라 불리는 정치대국이었다. 그렇다면 동서냉전체제가 붕괴된 오늘날 국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냉전은 군사력과 이데올로기의 세계적 양극화였다. 따라서 그 냉전의 붕괴는 결국 군사력과 이데올로기의 전면적 대결구조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붕괴된 냉전체제의 공백을 메우면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힘이 경제력이며 그 경제력을 뒷받침해 주는 핵심은 그 나라의 총체적 지력, 다시 말하면 문화의 힘이다. 세계의 많은 석학들은 역사의 방향과 국력의 중요한 지표로서 문화에 눈을 돌리고 있다. 월러스타인은 금후 반세기 동안은 세계가 거대한 무질서를 지속할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군사력과 이데올로기의 중요성을 대체할만한 요인으로 문화를 들고 있다. 지정학이나 지경학 이상으로 지문(GEO-CULTURE)학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헌팅턴은 문화의 충돌이라는 표현으로 지구화시대의 미래를 예측하고 있다. 1994년에 들어와 가장 인구에 회자될 인기용어는 국제화와 경쟁력일 것이다. 경쟁력이라고 하면 금방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잘 팔리는 상품인데 경쟁력있는 상품은 바로 그 나라의 국민의 지력·기술능력의 산물이다. 국제화란 결국 시대정신이나 세계의 추세에 적응하는 능력으로 보편성을 가진 지식과 그것을 토대로 하는 기술의 개발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근대사의 경험에서 보면 경제대국은 군사대국이었고 그 군사대국은 동시에 문화대국이었다. 그런데 현대의 지구촌의 인간들이 바라는 국가상은 군사력으로 위세를 떨치는 국가보다는 경제력과 문화력을 갖추고 사회구성원의 삶의 질을 높이는 나라이다. 경제력은 자국의 인민들을 잘 살게 하고 세계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는 기본적인 자원이며 문화의 힘이야 말로 한 나라의 주체적인 메시지를 국제화할 수 있는 귀중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인간화와 국제화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이 다름아닌 국력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정치의 최우선 과제는 경제의 활기와 문화의 창달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들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지금쯤 우리나라에도 서독 경제의 기적을 이룬 에르하르트나 프랑스 문화의 창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말로와 같은 인물이 나왔으면 좋겠다. 경제의 재건은 이미 전국민의 합의사항이 되었으나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자각이 부족한 것 같고 더욱이 「문약」이라는 말에 익숙해 있는 우리의 풍토에서는 자칫 문화를 경제의 종속변수쯤으로 보는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경제는 결국 지력의 총화인 문화의 힘을 배경으로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스펜서가 지적했듯이 예술은 여가의 산물이지만 경제의 꽃은 야만의 토양속에서는 피지 않는다. 이처럼 경제와 문화는 서로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이며 특히 앞으로는 국민총생산(GNP)도 수치의 과시만이 아니라 국민총문화(GNC)와의 상호보완성을 생각해야 하며 이것이 정녕 선진의 지표임을 알아야 한다. 경제와 문화의 경쟁력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승부로는 어려우며 중·장기적인 전략을 토대로 하여 국민의 잠재력을 창조적으로 피어나게 해야 한다. 여기에 당연하게도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다. 문화국가는 교육국가에 다름아니며 현실적으로 경제력과 문화력을 키우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교육이외에는 없다. 교육제도와 의식의 발본적 개혁을 통한 질적 향상 없이는 경제와 문화의 경쟁력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가장 값진 삶은 문화적인 삶이며 경제력은 이 양질의 문화적인 삶을 위한 물질적인 지원인 것이다. 따라서 문화의 힘은 경제력의 기반인 동시에 그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새해 벽두에서 문화를 열쇠개념으로 세계의 흐름과 역사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석학들의 얘기를 되새기면서 경제와 함께 문화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고자 한다. 다행히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김구선생께서 흡사 오늘을 예언이라도 하듯 우리 후손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력(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만 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길게 인용해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은 오늘의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부력은 경제력이고 강력은 군사력이다. 현실정치에 필수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추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했던 참담한 조국의 미래를 문화의 힘으로 열어보려던 백범의 호소는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충족시키고 있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을 극명히 밝힌 것이다.<고대 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고대 교수·한국평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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